바빌론 유배 1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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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신은근 바오로 신부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287
발행일자 201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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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졌다(BC 931년). 북쪽은 10지파 연합체였기에 이스라엘 국명을 고수했고 남쪽은 유다왕국이라 했다. 유다 지파가 절대다수였기 때문이다. 211년 뒤 북쪽이 먼저 망한다(BC 722년). 백성들은 아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고 남은 자들은 이주해온 이방인과 섞여 살아야 했다. 사마리아인 조상이다.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를 막아냈다. 그러나 136년 뒤 바빌론 침략으로 결국 멸망한다. 왕과 백성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BC 586년). 바빌론 유배다. 포로지에서는 바빌론 말인 아람어를 사용했다. 이후 로마시대까지 아람어는 유다인의 일상어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유배는 3번에 걸쳐 있었다. 첫 번째는 기원전 597년. 바빌론 군대가 여호야킴 반란을 제압한 뒤다. 전투 중 여호야킴은 죽고 아들 여호야킨이 왕이 되어 버틴다. 그러나 3달 뒤 항복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왕과 지배계급을 포로로 데려갔다. 이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이가 치드키야다. 그런데 그가 11년 뒤 반기를 들자 유다왕국을 멸망시켜버린다. BC 586년이다. 왕과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다. 두 번째 유배다. 

3번째는 BC 582년 이었다. 바빌론이 임명한 그달야 총독이 암살되자 연관된 이들을 모두 잡아간 것이다. 전체 포로 숫자는 확실치 않다. 오천에서 만 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2열왕 24,16. 예레 52,30).

 

유다인은 유배지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공동체를 형성했고 집과 땅도 소유했으며(예레 29,5) 예루살렘과 서신도 가능했다(예레 29,1). 정착지는 크바르 강변으로 바빌론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들은 텔아비브라 불렀다(에제 3,15). 텔은 언덕이며 아비브는 봄이다. 해방(봄)을 희망한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현재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Tel-Abib는 유배지의 이 이름을 되살린 것이다. 1909년 황무지였던 땅을 매입해 신도시로 만들었다. 국제공항이 있으며 이스라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키루스 왕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다. 이듬해(BC 538년) 키루스는 유다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다. 바빌론 유배가 끝난 것이다. 페르시아가 귀환을 허락한 건 정치적 배려였다. 가나안 땅에 우호 세력을 심어 이집트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유다인은 키루스 왕을 기름부음 받은 자로 표현했다. 메시아 칭호를 준 것이다(이사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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