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유배 2

posted Jan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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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신은근 바오로 신부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288
발행일자 201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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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유배에서 유대인은 지난날을 돌아봤다. 선민 이스라엘이 어쩌다 이방인 포로가 되었는지 돌아봤다. 우상숭배의 벌로 받아들였다. 율법을 어긴 보속이라 여겼다. 다시 계약에 충실하기 위해 전승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서가 편집되고 모세오경의 틀이 갖추어진다. 구약성경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배생활 최대 수확이었다. 다윗은 왕이 되자 예루살렘 제사만 허용했다. 다른 장소의 제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후대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사라진 것이다. 제사드릴 장소가 없어진 셈이다. 충격이었다. 종교 예식은 제사보다 말씀을 듣는 쪽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레 안식일과 축제일이 엄격하게 지켜졌다. 할례는 더욱 철저히 시행되었다. 

 

이후 율법과 전통이 믿음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전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이들도 나타났다. 새로운 예배의식도 생겼다. 유대교(유다이즘) 토대가 형성된 것이다. 모임장소를 시나고그Synagogue라 했다. 희랍어 시나게인(synagein 함께 모이다)에서 온 말이다. 신약성경은 회당이라 했다(마태 6,2). 유대인은 어디에 살든 회당 중심으로 뭉쳤고 교육장소로 발전시켰다.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지만 회당은 남아있었다. 축제 땐 성전에도 참여했고 회당에도 참석했다. 유대인 남자 10명 이상 되면 회당을 세울 수 있었다. 회당장會堂長은 권위를 가졌고 명예직이었다. 

 

바빌론 유배는 기원전 538년 끝난다. 유대인은 몇 차례 나눠 바빌론을 떠났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못 떠나고 남은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최초의 디아스포라Diaspora다. 외국 거주 유대인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기원후 1세기 해외 거주 유대인은 대략 500만 명이었고 대부분 로마제국 내에 살았다.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도 가나안에 살던 유대인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훨씬 많았다. 역사상 가장 큰 디아스포라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공동체였다. 기원전 1세기 경 당시 알렉산드리아 인구 40%를 차지했다고 한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유배생활을 함께 했다. 그는 바빌론과의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던 지도자다. 하지만 항전파가 득세했고 결국 전쟁에선 패했다. 임금은 잡혀서 끌려갔고 에제키엘도 포로가 되었다. 유배지에선 희망을 심으려 애썼다. 포로생활은 결국 끝나며 주님과 새로운 계약이 맺어질 것이라 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도 예언했다.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을 철저히 무너뜨렸고 새롭게 일으켜 세운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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