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유토피아냐, 하느님 나라냐

posted Jun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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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흠..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16세기 토마스 모어가 쓴 소설의 제목이자 그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나라 이름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ou-topos(없는 장소)와 동시에 eu-topos(좋은 장소)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즉, 유토피아는 ‘이상향’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인 셈입니다.
걱정도, 어려움도 없이, 편하기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낼 수 있는 곳, 결국 이상의 나라가 아닌 환상의 나라일 뿐입니다. 

 

 

바빌론과 예루살렘


그리하여 큰 도성이 세 조각 나고 모든 민족들의 고을이 무너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격렬한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묵시16,19

 

바빌론은 성경에서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세속적 권력, 타락, 그리고 하느님을 대적하는 악의 상징입니다. 부와 군사력, 화려함으로 대표되던 바빌론은 그 내부에 정의의 빈곤과 우상의 지배가 가득했습니다. 
바빌론은 이스라엘의 눈에 유토피아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집트를 그리워하고, 약속의 땅에서도 세속 왕국을 원했던 그들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기보다 ‘바빌론이 된 예루살렘’을 바랐던 역사의 슬픈 그림자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새 예루살렘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묵시21,2

 

이 새 도성은 인간의 손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이 아니며, 이스라엘의 유토피아적 왜곡된 꿈도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이 친히 완성하시는 창조의 결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고난을 살아내며 통과해 정화된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눈물은 닦여지고 슬픔은 사라진’(묵시21,4) 곳, ‘즐거움’으로 창조된 예루살렘에서, 백성은 ‘기쁨’으로 창조됩니다(이사 65,18). 더 이상 “소박맞은 여인”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 된 도성입니다(이사 62,4).

 

 

현실을 포용한 이상, 현실에 뿌리 둔 희망


희년 칙서가 말하는 희망의 의미는 인간 욕망에 기반한 유토피아적 상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지향함입니다. “시련과 환난은 몰이해와 박해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희망의 증거자’들의 삶의 특징이며,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어둠을 가르는 빛을 봅니다”(4항). 이상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음에서 출발하며, 그런 모든 현실적 어려움을 기꺼이 살아내며 나아가는 “인내”(4항)의 “순례”(5항), 그것이 바로 희망의 길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우리가 사는 땅 위에서 꽃피워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