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느님 은총에서 희망을 찾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시대의 징표들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대로,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한한 선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희년 칙서 7항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우리에게 씁쓸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나약함을 보면,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은 공허하게만 들립니다. “원래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라는 극 중 대사처럼,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기댈 곳 없는 죄인들끼리의 위태로운 의존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연약한 존재(로마 3,9 참조)이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사람을 믿으신다
신앙은 이 절망적인 질문 앞에서 빛나는 답을 제시합니다. 희망은 인간의 완벽함에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는 나 자신도 죄인이듯, 내가 비난하는 저 사람 역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믿으셨기에, 친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존재는 형태를 따른다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존재는 형태를 따른다(Esse sequitur formam)”라는 중요한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는 반드시 보이는 구체적인 형태 안에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결코 직접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존재’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이 사랑은 추상적 개념으로 머무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형태를 취해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의 ‘원형’을 드러내는 ‘모상’이자, 그 사랑의 구체적 ‘형태’이십니다.
따라서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은 ‘막연한 기대’나 ‘이미 사실’이라기보다, ‘사람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형태를 드러내야 한다’는 준엄한 요청이자 거룩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이라는 존재에 뿌리박고 있다면, 우리의 삶 역시 그 사랑의 형태를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연약하고 쉽게 유혹에 무너지지만, 바로 그 마음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따를 수 있는 ‘초월의 자리’가 됩니다.
희년의 초대
‘하느님이 희망’이라는 고백은, 이제 ‘사람이 희망’이어야 한다는 책임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무너지면 세상이 어두워지고, 사람이 일어서면 세상이 밝아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형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을 변모시킬 수 있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