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의 초 세기에는 동서방에서 모두 시노드가 자주 열려 하느님 백성의 일치와 충실한 복음 선포를 보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희년은 이러한 시노달리타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저마다의 은사와 직무를 통하여 공동의 책임을 맡습니다.
-희년 칙서 17항
갈등을 이해와 하나됨의 기회로
“요즘 세상에 좋은 일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세대간, 남녀간, 이념간 갈등까지, 우리 사회에 너무 많은 분열이 일어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잘 해결되면 더 깊은 이해와 조화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다.”
영성면담에 앞서, “지금 내가 사는 시대 안에서 나는 어떤 ‘희망의 징표’를 발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신학생의 답입니다. 어떻게 더 커진 갈등이 오히려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을까요?
과거의 위계적 사회 구조 안에서는, 많은 이들이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억눌려 있었기에, 외적 갈등이 적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갈등은, 적어도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발전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몸부림일 수 있습니다. ‘다름’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희망의 징표이며 불씨입니다.
문제는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만을 높이려 드는 태도입니다. 대화를 말하지만 혼자 말하려 들고, 소통을 말하지만 자기 목소리 듣기만 요구합니다. 토론이라 말하지만, 자기주장뿐입니다. 자기 목소리를 더 크게 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진솔함이 담긴 ‘내 목소리’를 모두가 낼 수 있고, 그리고 그 목소리들이 제대로 만날 때, ‘다름’은 획일화가 아닌 조화된 ‘같음’의 길로 나아갑니다.
위계적 질서(Ordo)와 조화로운 질서(Cosmos)의 만남
교회는 언제나 질서를 중요하게 여겨 왔습니다. 전례와 사목, 그리고 복음 전파 등, 교회의 모든 일이 권위 있는 질서(Ordo)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위계적 질서는 교회의 권위와 중요한 직무 수행이 정당하게 이루어지도록 보호하는 핵심 축이기에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질서가 단순히 ‘위계적 권력’으로만 작동한다면 시노달리타스는 구현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를 충실히 지키며 공동의 책임을 다하고, 서로를 향한 진정한 존중으로 소통될 때, 오르도적 질서는 봉사를 통한 조화로운 질서(cosmos)로 완성됩니다.
시노달리타스, 행사가 아닌 삶으로
시노달리타스는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교회가 처음부터 숨 쉬어 온 본래의 호흡입니다. 그것은 곧 함께 걷는 교회의 모습이며, 세례 받은 모든 이 ‘공동의 책임’ 안에서 교회의 일치와 복음 선포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원리이자, 우리 신앙인의 일상적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성찬례를 마칠 때 사제가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로 파견하듯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곧 가정, 일터, 사회 속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살아야 합니다.
희년은 끝났지만 시노달리타스는 계속되는 여정입니다. 교회는 행사가 아니라 삶으로써의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곳곳의 우리 각자가, 희망의 징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