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를 솔찮게 먹으면 누구나 “엊그제 같은데…”라고 여기는 일이 다반사다. 정말 엊그제 같은데 세례 40주년이 다가온다. ‘25살’ 그 나이를 무어라 부를지 모르지만 참 좋은 나이에 난 ‘스테파노’라는 이름을 하늘로부터 받았다. 그 해는 1984년 이른바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이었다. 1979년 대학생이 되었고 그 다음 해 5.18 광주의 비극이 발생했으니 젊은이가 살기에는 참 험한 시절이었다. 쫓기듯이 창원이란 도시를 선택했고 노동자로 살기로 작정하였지만 내 발걸음은 지남철에 이끌리듯이 성당으로 향했다. 성령을 모르던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성령의 힘이 아니었으면 무엇으로 말할 것인가?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1989년 제44회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지금은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두 번째로 방한했다. 대회의 마지막 날 서울 잠실체조경기장에서 <젊은이의 성찬제>가 열렸다. 지금 마산교구장 서리인 신은근 신부님이 교육국장으로 계실 때의 일이다. 교구 청년연합회가 없던 시절이라 엉겁결에 교구 청년 대표자 역할을 맡아야 했다. 각 교구의 청년들이 행사를 앞두고 몇 번인가 서울에서 모임을 했다. 마침내 마산교구 85명의 청년들이 함께 행사에 참여했고 나는 청년 대표로서 교황님 앞에 섰다. 아, 이런 일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그 시대는 갈등이 첨예한 시절이었기에 청년들은 ‘화염병과 최루탄 그리고 성경’을 브론즈로 만들어 미사 봉헌물로 바쳤다. 교황님은 인자로이 받아주셨다. 돌아보면 모든 일은 성령이 하신 일이었다.
세례 40년을 살아오면서 꾸준히 몸담고 참여했던 교구 민족화해위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고향 평양을 떠나 남쪽으로 오신 선친의 영향이었을까? 남북으로 갈라져 사는 민족의 ‘하나 됨’을 생각하면서 북녘 지원사업이든, 정착주민(탈북민)을 위한 사업이든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보람찬 일이었다. 위원회에 몸담은 지 20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평화교육, 평화순례, 평화미사를 통해 만난 숱한 사람들 그리고 시나브로 퍼져 나가는 ‘평화’의 기운은 주님이 부활의 첫 메시지로 주신 성령의 힘이었다.
40년 동안 세례와 견진 그리고 혼배성사를 거쳐 한 본당에서 살았다. 그 본당에서 큰딸의 혼배성사가 있던 날 무릎 꿇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일 새벽미사를 매번 참례하면서 본당을 다녀가신 신부님, 수녀님, 평신도 선후배들을 때때로 마음속에 떠올린다. 감사드릴 일과 용서 청할 일, 말 그대로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가 가득하지만 그 모든 것이 성령의 빛 안에 담겨있다고 감히 고백한다. 돌아보니 모두 성령이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