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5.05.22 11:14

감사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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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정아 안젤라 동화작가 / 가톨릭문인회

며칠째, 쌀쌀한 봄날이다. 어젯밤 바람까지 세차게 불더니 화분 하나가 넘어져 깨져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당
에는 작약과 튤립이 몽우리를 달고 올라와 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마당은
색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대충 깨진 화분을 정리하고 비워진 종이 박스를 챙긴다. 어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장바구니 대신 담아온 것이
다. 언제부터인가 마트에서 식료품과 채소, 과일 등을 사면 종이 박스에 담아 차 트렁크에다 싣고 오게 된다. 그렇
게 모은 것은 폐지 모으는 아저씨 집으로 가져간다.
며칠 모은 것들을 챙겨 가니 대문에 긴 천이 둘러쳐져 있다. ‘이제 종이 박스는 받지 않습니다. 각자 처리 부탁
드립니다.’라는 불길한 글이 눈에 들어온다.


주택으로 이사 온 이후로 종이 박스를 모아 주는 일은, 성당에 다니며 작은 봉사를 실천한다는 나만의 생각이
다. 이웃들도 으레 폐지를 한 아름씩 가져온다. 그러면 두 부부는 그것들을 분리해 차곡차곡 쌓아 노끈으로 묶
는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키 높이보다 몇 배나 높이 쌓아 올려 큰길 건너 고물상으로 팔러 나간다.

아저씨는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어느 날, 남편이 집에 있는 녹슨 철판 뚜껑을 가져가, “이것도 받습
니까?” 물었는데 아저씨가 고개만 끄덕이며 손짓만 했다는 것이다. 그 뒤, 서로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그냥 웃어
준다.


아저씨의 모습에서 나의 쓸데없는 상상이 꼬리를 문 적도 있다. 언제나 같은 모자, 왜소한 체격과 깨끗하지 못
한 옷차림,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이 수레만 끌고 다녀서이다.
‘아저씨는 자식이 없는 걸까? 아주머니는 어디가 아프신가?’


우리는 살면서 언제부터인가,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으려 한다. 남의 일에 끼어들거나 사생활 침해는 예의가 아
니라는 것이다. 또 타인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공원으로 가던 중, 아저씨 집 앞에 네 명의
젊은 사람이 종이 박스를 정리하고 있다. 불빛에 그들은 반듯하게 생긴 젊은 남녀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긴 천에
쓰인 글을 가리키며, 아저씨의 안부를 묻자,
“네, 며칠 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이웃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라 하
셨습니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가 생각한다. 아저씨는 자신의 위치에 순응하며 열심히 살았다. 마지막 인사로 감사라는 큰 무게를 눌러준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는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산 일생은 다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한다. 부디 좋은 곳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길 빌어본다.


달이 떠오르고 주인 없는 마당에서 매화꽃이 바람에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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