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책 한 권을 보여주면서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합시다!” 하고 대답했다. 독서토론이라고 하면 우선 책 읽기를 좋아해야 하고, 서로 시간이 맞아야 하고, 책 내용이 취향에 맞아야 하고,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비용도 아깝지 않아야 하는 등 조건이 많다. 이 중에서 누구 한 명이라도 껄끄럽거나 껄끄러운 친구의 친구가 있어도 어색해진다. 나는 이런 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대답해버렸다. 돌이켜보면 나의 온 생애가 이랬다. 그랬음에도 아직 멸망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행동을 반성하기도 하지만, 이랬기 때문에 맞이한 번영이 더 많다. 이 지인에게서 나는 주님을 본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시는지, 어떻게 자비를 베푸시는지, 어떻게 성장시켜 주시는지, 세밀하게 보고 느낀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예” 하였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본다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심장 높이에 두고 한순간도 나를 땅에 떨어뜨리지를 않았다. 그를 따뜻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삥 둘러쳐 있고, 모두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우 엄격하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눈보라를 보고 가고, 어떤 이는 아지랑이를 보고 온다. 나는 둘 다 경험을 했다. 이것은 그가 지닌 성향이 아니라 내 행동이 그것들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분방함이 엄격한 그에게는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며 이렇게 인연을 이어오는 동안 얼마나 참았는지를 알고 있다. 어쩌면 그는 나를 좀 챙기라는 주님의 지시가 있었던 게 아닐까, 나의 자동 응답도 그래서 세팅이 돼버린 게 아닐까.
소책자의 제목이 『정의가 미래를 창조한다』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독일 신학자 유르겐 몰트만 교수가 쓰고 한국인 신부가 번역한 이 책은 세상의 방대한 문제를 강력한 필력으로 담백하게 표현했고 신앙인이라면 이 책에서 성령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호기심과 오기가 발동하지 아니할 수가 없도록 해 놓았다.
하지만 이 책으로 어떻게 참가자들을 불러들일 수 있느냐? 혼자 걱정하고 있을 때 지인은 본당 신부님을 한번 찾아가 보자고 했다. 닿으면 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인상이 차가운 우리 신부님, 그런데 또 “예” 하고 대답해버렸다. 뇌를 거칠 겨를도 없이 바로 중추신경에서 반사하는 대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걱정거리는 한 방에 해소되고 본당주보에 공지가 나간 지 이틀 만에 스무 명이 꽉 찼다. 그리하여 매주 화요일 오후에 모여 두 시간씩 토론하고 5주 만에 마치게 되었다.
시대마다 인류를 위협하는 문제는 쭉 있었다. 아우슈비츠수용소라던가, 핵폭탄, 자연 파괴와 이념에 의한 정신 말살 등등. 이 거대한 문제를 스무 명이 논한다고 하여 세상 그 어떤 모퉁이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가스실에서 온몸으로 죽어가며 “주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고 절규할 때 주님도 그들과 함께 고통 속에 계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선물은 따로 있었다. 사람은 모여야만 했다. 그 속에서 우정을 쌓고 친밀감이 형성되면 거기서부터 하느님 나라가 구축된다는 걸 선명하게 보았다. 선행이든 복음이든 정의든 생명이든 이 또한 모여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예, 여기 있습니다.”로 응답하고 만난 사람들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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