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열 개째, 아이의 입안으로 보슬보슬 잘 익은 삶은 밤이 쏙쏙 들어갔다. 만화책을 보면서 엄마가 먹여주는 밤을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아이를 위해 밤 껍질 잘 벗기는 방법까지 검색해 가며 손과 눈이 분주했다. 최대한 얇게 껍질을 벗기기 위해 집중해서 밤을 까고 있는 나에게 아이가 물었다.
“엄마 딱딱한 껍데기 속에 이렇게 맛있는 알맹이가 숨어 있는 걸 누가 발견했을까?” 기특한 질문도 할 줄 아는 녀석, 손가락이 아프도록 밤을 까먹인 보람이 있구나 절로 흥이 났다. 그런데 뭐라 답해주어야 하지? 답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는 질문으로 돌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니던가. “네 생각엔 누가 처음 발견했을 것 같은데?” 나의 질문에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엄청나게 인내심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아. 뾰족한 밤송이에 딱딱한 껍질에 떫은 것까지 세 겹 다 벗겨야 되니까.” 아이의 교과서 같은 대답에 흐뭇해하며 나도 모르게 연신 자애로운 엄마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맞네. 끈기 있게 끝까지 껍질을 다 벗겨본 사람이겠구나. 혹시 그 사람에게 인내심 말고 다른 마음은 뭐가 있었을까?” 다시 두 번째 질문을 던지며 나는 나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만 산파술을 하는 것이 아니로다. 밤을 까며 엄마도 얼마든지 지혜로운 대화가 가능한 것이렷다. 한껏 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엄마는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거야?” 나는 기대와 다른 아이의 되치기에 당황스러웠다. “아, 아니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같이 생각해 보면 좋잖아….”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훈계의 말을 하고 싶은 엄마의 욕심을 아이는 예민하게 잘 잡아냈다. 그 이후로 우리 사이엔 지혜로운 대화 대신 정적만 남았다.
아이의 상상이 질문이 되어 즐거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밤 알맹이를 발견한 사람은 호기심, 탐구심, 용기, 끈기 같은 유용한 지능을 지녔을 거란 나의 지레 짐작과 가르치려는 욕심이 더해졌으니 당연히 길을 잃을 수밖에.
만약 밤 껍질 벗기는 나만의 기술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준 좋은 질문이라며 칭찬만 했더라면 우리의 대화는 계속 즐겁지 않았을까.
아, 내가 너무 과했구나. 후회가 밀려왔다. 이제야 떠오르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누구에게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콜로 4,6). 어느 때고 간을 맛있게 맞추는 적당한 소금의 양처럼 내 생각과 말 또한 그 자리에 필요한 딱 그만큼만 뿌릴 수 있는 지혜가 나에게는 언제쯤 주어질까. 아이에게 또 소금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키며 깨끗하게 껍질을 벗긴 밤을 건넸다. “이 밤 진짜 맛있다. 그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