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교구 전사前史 34
거제도 교우촌 (3)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시작된다. 가장 큰 원인은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한 보수 양반세력의 적개심이었다. 당시 지배층을 이루고 있던 그들은 제사와 신분제도를 거부하는 천주교인들에게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냈다.
다음은 정치적 이유다. 고종이 즉위하자 러시아는 두 번에 걸쳐 통상을 요구해온다. 다급해진 대원군은 교회 측과 교섭을 가지려 했다. 프랑스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 남침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 계획을 추진한 이는 승지承旨며 교우였던 남종삼南鍾三이다.
그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대원군과의 면담을 주선하지만 실패한다. 지방에 있던 주교를 연락해 모셔 오는 데 한 달이 걸린 것이다. 그 사이 정세는 바뀌고 있었다. 국경의 러시아 세력이 잠잠해진 것이다. 주교와의 조속한 회동을 기다리던 대원군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더구나 정적政敵들이 그의 천주교 접근을 눈치채고 공세를 취하자 돌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탄압 쪽으로 돌아선 것이 병인박해다. 박해는 그의 실각 때까지 7년간 계속되었다. 조선교회는 처참히 무너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다. 살아남은 교우들은 집과 재산을 잃은 채 숨어 지내야 했다.
병인박해는 경남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이곳엔 8곳의 교우촌 지역이 있었다. 문산, 사천, 고성, 통영, 거제, 남해, 마산龜山, 의령이다. 1861년 리델 신부가 입국할 때 지녔던 교우촌 지도가 입증한다. 박해가 계속되자 이들 지역의 교우들도 어쩔 수 없이 피신하게 된다. 교우촌 해체가 시작된 것이다.
거제도 교우촌도 이렇게 해서 사라졌다. 박해 중이라 그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대부분 통영을 거쳐 내륙 쪽으로 들어갔고 먼바다 섬으로 피신한 이도 있었다. 남해南海 교우촌의 경우는 이렇게 해서 사라진 뒤로 영영 회복되지 못했다. 박해가 끝난 뒤에도 남해에는 교우들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1873년 대원군은 실각한다. 그가 물러가자 박해도 끝나게 된다. 숨어 있던 피난 교우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의 교우촌 지역으로 들어가거나 여건이 나은 곳을 찾아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첩첩산중에서 화전과 옹기로 생계를 이어가던 교우들까지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거제도에 새로운 교우촌을 다시 일으키는 순교자 윤봉문尹鳳文의 가족도 이 시기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경북 영일군에서 양산, 대청(지금의 기장)을 거쳐 점점 남쪽으로 내려왔고 마지막 도착지가 거제도였던 것이다. 옥포본당 초대 신부였던 김후상(金厚相 1901~1983) 신부는 윤봉문 가족과 옥포 지역 유지였던 진진부陳進富와의 만남을 1879년 가을이라고 적고 있다. (김후상. 거제도 천주교 연혁 11면)
아무튼 당시 옥포의 동수(洞首 현재의 洞長)였던 진진부의 후원으로 윤봉문 가족은 거제도에 정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옥포 지역에 새로운 교우촌이 등장했다. 병인박해로 사라진 교우촌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첫 회장은 순교자의 형 윤경문(베드로)이 맡았다. 훗날 윤봉문은 진진부의 사위가 된다. 순교복자 윤봉문이 살았던 집터엔 이후 국산성당이 세워지고 1923년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헌당식을 거행했다. 2015년 국산성당은 새롭게 단장된 경당으로 바뀌었고, 국산성당 정문에 천주당天主堂이라 새겨 넣었던 건물은 보존되어 있다.
조선대목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