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전사前史 38

posted Aug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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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사38

진주본당 설립(2)

 

1895년 고종은 조선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로 나눈다. 진주에는 진주부가 설치되고 관찰사가 거주했 다. 당시 관찰사는 지금의 도지사(道知事)였고 행정권과 함께 사법권과 군사권까지 갖고 있었다. 진주는 경남의 중심 도시가 된 것이다. 부산 본당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진주에 본당을 세우려 했던 이유 중의 하나다.

 

진주부晉州府 중심은 진주성晉州城 안쪽이었다. 지금의 본성동 일대다. 이곳에 관찰사 집무실이 있었고 치안 을 담당하는 포도청도 있었다. 당시는 중성동中城洞이라 했다. 진주성 한가운데란 뜻이다. 1939년 진주시 전역이 일 본식 동명으로 바뀌면서 혼마찌本町라 했다가 해방 후 본성동이 되었다.

 

타케 신부는 이곳 진주성 안쪽에 성당을 마련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지 매입이 어려웠다. 값도 비쌌지만 양인 (洋人)이 오는 걸 떨떠름하게 여겨 팔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타케 신부는 신자들이 마련해 두었던 집 옆에 또 한 채의 집을 매입한다. 그리고 먼저 집은 성당으로 사용했고 두 번째 집은 사제관으로 개조했다. 하지만 타케 신부 는 이 장소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1년 뒤 타케 신부는 본당을 마산으로 옮긴다. 그 과정에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는데 한 편지에서 진주본당 위치를 알리고 있다. ‘진주성당은 술집과 접대부와 아전(衙前)들이 사는 나쁜 거리에 있습니다.’ 한국교회사 연구소는 뮈텔주교와 연관된 문서에는 일련번호를 붙였다. 위의 구절이 나오는 타케 신부 편지는 뮈텔 문서 1900-8로 명명(命名)되었다.

 

이 편지가 당시 진주본당 위치를 추측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그렇다면 술집과 접대부가 있고 아전이 살았던 곳 은 현재의 어디쯤에 해당될까? 아전(衙前)은 관아에 딸린 하급관리였지만 녹(祿)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지역민이 세 습적으로 아전 일을 맡았다. 당연히 텃세가 심했고 부정부패도 상당했다.

 

아전 중에도 역(驛)에서 일하는 이들은 나름 세력이 있었다. 이곳은 관리들이 말을 바꿔 타는 장소였고 조정의 공 문서 역시 이곳에서 받기도 하고 보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진주역은 평거면平居面에 있었고 진주성 서쪽 5 리 지점 석갑산石岬山 아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막이 성행했던 거리는 평거역과 진주성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이현동二峴洞과 상봉동上鳳洞 일 대로 추정한다. 구한말 이 지역은 진주군 중안면中安面에 속했고 고개가 둘 있었기에 두우개라 불렀고 한문 표기한 것이 이현二峴이다.

 

진주본당 설립에는 공소 회장들의 숨은 노력이 많았다. 판공 때면 선교사들에게 본당 신설을 역설했고 틈만 나 면 한성(서울)의 뮈텔주교에게 신부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1898년 7월 21자로 뮈텔 주교에게 진정서 를 보낸 일이다. 당시 공소 회장 11명이 연명한 이 진정서는 지금도 남아 있다.(뮈텔문서 1897-51)

 

결국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 타케 신부가 진주로 갈 것을 자원했기에 본당신설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가 진주 에 부임하자 평거역 인근주민들은 서양인이 오니까 관(官)의 횡포를 막아 줄 것이란 기대감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 전들은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그를 괴롭혔다.

 

타케 신부는 1873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입국 때 25살이었다. 진주 본당 신부로 올 때는 27세 젊은이였 다. 젊은 나이였기에 상황판단이 빨랐고 결단력이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많았다면 타케 신부는 진주에 오지 않고 부산에 머물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