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교구 전사 39
진주본당 설립(3)
진주본당을 추진했던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였다. 1898년 1월 25살 나이로 조선에 입 국했고 감곡 본당(忠北 陰城郡 甘谷面)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던 중 부산본당 3대 주임신부로 발령(1898년 5월) 받았다.
입국 4달만의 일이었다. 성직자가 귀한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타케 신부는 즉시 부산본당으로 부임했 다. 당시는 영도에서 나와 초량草梁에 성당이 있었다. 관할구역은 경남 전체였다. 조선말이 서툴러 당분간 비서인 복사 (服事)를 대동하고 다녀야 했다.
타케 신부가 본당에 부임하자 사건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라실長在里 교우 몇몇이 포졸에게 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는 보고였다. 현지 사정에 어두웠던 타케 신부는 대구의 로베르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노련한 로베 르 신부는 먼저 진주 관찰사에게 항의 서한을 보낸 뒤 법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다. 며칠 뒤 타케 신부는 교우 들을 풀어낼 수 있었다.
비라실 교우 투옥 사건은 1898년의 일이다. 10년 전 1888년에는 같은 진주 감옥에서 거제 교우 윤봉문(요셉)이 순교 하였다. 진주는 여전히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포졸들은 교우들을 범죄자 대하듯 했고 외인들과 합세해 재산을 가로채려 한 사건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진주 교우들은 타케 신부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신부의 복사(服事)였던 김윤중 (金允中)이 사건을 일으키면서 진주에서의 시작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폭력배를 동원해 배상찬(裵相贊)이란 사람에 게 800냥 빚을 갚도록 협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시한 빚 문서는 가짜였다. 배상찬이 거부하자 배씨와 가족들을 성당 으로 데려와 폭력을 행사하다 관청에 고발되었던 것이다.
복사였던 사람이 어찌하여 성당에서 이런 일을 했을까? 김윤중은 서양신부와 관(官)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 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진주성당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외인들에겐 웃음거리가 되었다. 명예를 회복하려면 시 간이 걸릴 것이다. 타케 신부는 이렇게 회고했다. 진주 본당을 옮기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타케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9년 7월 28일자 편지에 의하면 아전들이 범죄자를 잡는다는 구실로 사제관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었다. 김윤중을 잡기 위해 그랬던 것이었다. 여하튼 진주에서 1년을 보낸 타케 신부는 본당을 옮기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몇 가지 이유를 주교에게 제시했다. 핵심은 다음 두 가지였다.
진주본당 신자는 대부분 공소에서 오는 교우들이다. 진주성 안에 거주하는 교우는 별로 없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 가지다. 더구나 김윤중 사건으로 교회는 신망을 잃었고 회복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진주성당 주변에는 접대부 있는 술집이 많다. 교우들 다니기엔 좋지 않은 동네다. 그런데다 건물이 낡아 위험하다. 수리를 하려니까 2백원이란 엄 청난 돈이 든다.
1899년 당시 200원은 지금 돈 얼마일까? 1890년대 화폐가치를 현재금액으로 환산하기 쉽지 않다. 당시 1원은 10냥 이었고 나라에서 정한 쌀 1섬 가격이 5냥이었다. 1섬은 144kg 정도다. 2024년 쌀 20kg을 5만원으로 보면 조선시대 쌀 1 섬은 지금 돈 36만원에 가깝다. 따라서 조선시대 1냥은 대략 7만원이다. 200원이면 1억4천만 원이 되는 거금이었다.
본당을 옮기기로 결심한 타케 신부는 후보지 물색에 나섰다. 처음엔 소촌 공소(現 문산본당)를 생각했지만 결국 마 산으로 굳힌다. 타케 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비라실 공소로 옮겼다가 8일 뒤 진주를 떠났다. 당시 진주에 있던 본당을 마산으로 옮겼지만 교구 공문에 의한 새로운 본당신설은 아니었다. 당시는 진주와 마산이 다 같이 한 본당 관할권 안 에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