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교구 전사 40
진주본당 설립(4)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의 진주 본당은 1년 만에 철수한다. 1899년 6월 3일 그의 부임으로 시작되었다가 1900년 6 월 그가 진주를 떠나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타케 신부는 본당을 진주에서 마산으로 옮겼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그는 마산에 가서도 판공 때면 진주를 방문했다. 여전히 진주는 그의 관할 구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주 본당 1년은 마산 본당의 역사가 되지 못했다. 훗날 완월동 본당이 마산 본당을 이어 받지만 전사(前 史)로 보기엔 무리였다. 완월동 본당과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진주엔 1926년 옥봉동 본당이 설립된다. 진주 본당 1 년은 이곳의 전사로 남아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공중에 뜬 기록이 될 수 있다.
타케 신부가 마산으로 간 뒤 성당으로 사용했던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주 교우들은 본당 신부가 마산으로 떠 나자너무섭섭해했다.그래서뮈텔(Mutel閔德孝) 주교에게진주와마산에각각신부한분씩보내줄것을간절히건 의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성직자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교우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비라실長在洞에 집 한 채를 마련한다. 집을 구입한 자금은 성당으로 사용했 던 집을 매각한 돈의 일부였다. 타케 신부도 성당이었던 집은 매각했고 두 번째 집을 구입할 때 빚을 졌기에 대부분 빚 갚는데 사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진주 본당에 대한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서부 경남 중심본당으로 만들어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활 용하려 했던 본당이었다. 그러나 타케 신부는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진주성 안쪽에 교우들이 전혀 없었다는데 있다. 주일엔 공소교우들이 모였지만 평소엔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일 년 내내 평일 미 사를 드렸지만 교우는 자신의 복사와 하인 1명 이웃 노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정을 내리자 타케 신부는 마산 본당 신설에 진력했다. 진주 본당의 역할을 하루 빨리 마산 본당에서 하고 싶었 던 것이다. 초여름에 마산으로 떠났던 그는 그해 겨울 성탄 판공 때 다시 진주 공소를 방문했다. 그는 본당을 옮긴 것이 아니라 진주에서 마산으로 사제관을 옮겨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의 진주 시내에 본당이 서는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초석을 놓은 분은 문산 본당 3대 주임이었던 김양홍 (金洋洪 스테파노 1874-1945) 신부다. 그는 진주 소재지에 진출하고자 교우들이 있는지 탐문하다 1919년 10여 명의 교우 들을 찾게 된다. 그들 중에 진주 토박이는 없었고 모두 하동 남해 쪽에서 이주해온 신자들이었다. 김 신부는 즉시 모 임장소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책임자로 남해 창선昌善 사람 이낙종(李樂鐘 스테파노)을 임명했다. 훗날 그는 진 주본당 초대회장이 된다.
당시 마련한 집은 지금의 옥봉동 성당 인근이었다고 한다. 김 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당시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 교에게 알리고 문산 본당 소속 공소로 등록했다. 이것이 진주읍 옥봉동 공소의 출발이다. 한편 진주의 중요성을 감 안한 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공소 건물을 지을 수 있게 120평의 땅을 확보해 주었다. 현재 성당 건물 이 서있는 장소다.
구입자금은 미국의 한 신자가 드망즈 주교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이후 공소건물이 완공되자 드망즈 주교는 직 접 방문하여 축성식을 가졌고 1926년 옥봉동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초대 주임은 정수길(鄭水吉 요셉 1897-1978) 신부였다. 설립당시 진주성당이었지만 1965년 칠암동 본당이 신설되자 1967년 옥봉동 성당으로 개칭되었다.
- 마산교구 전사 원고는 이번호로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집필해주신 신은근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