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

거제(巨濟)로 유배된 순교자의 딸 유섬이(柳暹伊, 1793~1863)

 

 

주소: 경남 거제시 거제면 송곡 192(주차장)

관할: 거제 성당 055)633-4040

 

유섬이묘.png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딸 유섬이의 묘소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유항검은 동생 관검과 함께 체포된 후 1801년 음력 9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 형으로 순교하였다. 모반대역(謀反大逆) 죄인의 가족에게는 연좌죄가 적용되었으니, 당시 9세의 유섬이는 경상도 거제부 관비로 유배되었다유섬이에 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다가, 규운 하성래(圭雲 河聲來, 아우구스티누스) 박사가 거제 도호부사를 역임한 하겸락(河兼洛, 1825~1904) 선생의 문집 사헌유집(思軒遺集)의 해제(解題)를 집필하다가, 섬이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거제 도호부사를 역임한 하겸락 선생의 사헌유집3, 잡저(雜著), 서유록(西遊錄) 부거제(附巨濟)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철종 임술(1862)2월에 외직으로 나가 거제부사(巨濟府使)에 제수되었다. 거제도는 남쪽 해변의 한 섬 고을이었다. 견내량(見乃梁) 나루 앞에는 무이루(撫吏樓)가 있다. 옛날에 우리 종선조(從先祖) 문효공 경재(敬齋) 선생이 누각에 올라 지은 제영(題詠)이 걸려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형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판각(板刻)하여 걸었다.

거제부에는 71세 된 유 처녀(柳處女)가 있었다. 정조는 사학(邪學, 천주교)을 엄금하고, 범법자는 반드시 중벌에 처하고, 그 자녀는 관비로 보냈다. 조정의 유명한 벼슬아치 중에도 역시 죄를 범하여 불행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는 어느 집안인지는 모르나 역시 명족(名族)이라고 들었다. 아버지가 사학(천주교)을 범하여 딸이 관비에 속하게 된 것이다. 나이 7세였다. ()에 사는 노파가 수양딸로 삼아 기르며 바느질을 가르쳤다. 유는 평생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하거나 웃지 않고 발길이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날마다 바느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관노(官奴) 무리들이 감히 관비로 대하지 못했다. 나이 13~14세 되어 시집보내고자 하는 자(중매쟁이)가 있었으나 유는 나는 선비의 혈육으로 참혹하고 독한 화를 만나 지금 거제 관비가 되었다. 남편을 얻게 되면 반드시 관노(官奴)로서 아들을 낳으면 종()이 될 것이요, 딸을 낳으면 계집종()이 될 것이니, 이 괴로움을 내 어찌 당하리오? 다시 시집가라고 내 귀를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갚으리라.’ 하였다. 수양모를 섬기며 그 뜻을 순종하였다. 어미 역시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며 보호하였다. 나이 16~17세가 되매 그 어머니에게 제 나이 점점 자라 강폭한 남자의 손이 제 몸에 한 번 가해질까 두렵습니다. 몸을 더럽히고 그 욕됨이 크옵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흙과 돌로 한 집을 굳게 지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구멍과 대소변을 집 안에서 처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한 작은 창을 남향으로 내서 바느질하기에 편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대로 하였다. 유는 이처럼 자신을 보호하며 나이 40여 세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와 예사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한 자 길이의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고을 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절을 알고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하고, 유 처녀라고 불렀다.

1863(癸亥, 철종 14)7월 내가 체임(遞任)하여 돌아가려 할 때 형리가 유 처녀가 71세로 죽었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국법에 역적죄를 범하여 노비가 된 사람이 죽으면 검시(檢屍)하여 순영(巡營)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와서 보고한 것이다.) 슬프다! 천지 만물이 음양(陰陽)의 짝이 있지 않음이 없거늘, 억울하도다! 유 처녀는 외로운 여인으로 짝을 만나지 못하고 그 몸을 정결히 하고 이 세상에서 71세를 살았도다. 그 곧고 깨끗한 정절, 원한 맺힌 기운이 구천에 사무친다. 만약 유 처녀가 남자가 되었더라면 입신출세(立身出世)하여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움은 해와 달을 꿰뚫고 진실함은 쇠와 돌을 뚫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여자의 몸이 되어 참화를 입은 집안에 태어남이여. 그 정과 그 절개, 차마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아전을 보내 그 장사할 기구에 무엇이 미비한가 물으니, ‘()을 만들 나무, ()할 포목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여 내가 장사치를 것을 마련하여 다시 아전으로 하여금 호상(護喪)이 되어 장사를 치르게 하고, 또 병교(兵校)와 함께 가서 묻을 자리를 물기가 없고 무너지지 않을 곳에 잡되, 암석이 있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 깊이 묻으라 하고, 특별히 칠십일세 유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라고 아홉 자를 묘 옆 바위에 묘표(墓表)로 새겼다.”

 

하성래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학징의에서 거제도로 유배된 사람을 찾아보면 윤지헌의 아들 종근(鍾近),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李允惠), 유항검의 딸 섬이가 있다. 그 가운데 하겸락 선생의 기록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으로는 유항검의 딸 섬이뿐이다.”

 

천주교를 믿은 사람도 아닌 전통적인 유학자였던 거제 부사 하겸락 선생이 일개 노비를 위해 장례 비용을 부담하여 내간리 송곡마을 뒤 현 위치에 묘까지 마련하고 그녀의 생애를 자기 문집에 기록한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그만큼 유섬이의 삶이 고결하였고, 고을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성래 박사는 유섬이의 드러나지 않은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 처녀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것은 오라비인 동정 부부 유중철 요한과 올케 이순이 루갈다의 삶을 본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양반의 딸로 상민과 결혼하여 천인을 낳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만약 동정을 지키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남모르게 내면에서 깊이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고수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할 것이다. 흙과 돌로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집을 짓고 그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 생활을 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뒤늦게나마 유항검의 딸 섬이의 유배 이후의 삶이 한 목민관의 기록을 통해 후세에 전해진 것은 큰 섭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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