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연중 제17주일·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강론

posted Jul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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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론 이재호 베드로 신부

생명력 넘치는 고목古木

 

와인의 역사가 오래된 지역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널리 사랑받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늙은 포도나무’(Vieille Vigne)입니다. 수령이 최소 40년에서 길게는 100년이 훌쩍 넘어가는 고목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고급스럽고 깊은 맛을 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포도 알갱이가 더 크고 풍성하게 열리는 쪽은 어린나무입니다. 하지만 어린나무에서 촘촘하게 열린 알갱이들은 인접한 큰 알갱이에 가려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얕게 산발적으로 뻗은 뿌리로 양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도 없습니다. 이에 반해 오래된 나무는 몇 안 되는 자신의 작은 포도 알갱이들에 집중하며 충분한 볕을 쪼일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여러 지층으로부터 다양한 광물을 흡수합니다. 늙은 포도나무가 겉모습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가치를 더 크게 인정받는 이유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치를 결정짓는 이와 같은 기준이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합니다. 외관상 남들보다 크고 많고 싱싱해 보이는 것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 내가 받아들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쉽게 외면하고 내 입맛에 맞고 편한 이들만을 적당하게 상대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이 외면당하고 세상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이미 고목이면서 또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거목이기도 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늘 초대하십니다. 특히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고자 2021년부터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오늘로 네 번째를 맞는 이날을 통해 큰 위로의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늙어버린 때에 내던져지는 존재’(제4차 주제 성구, 시편 71[70],9 참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역사적 고목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수액이 많고 싱싱한 나무’(제2차, 시편 92[91],15 참조)로 우리를 맞아들이고 변모시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에(요한 8,58) 그 누구보다도 고목이신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살인 생명의 빵을 먹이신 뒤에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고 하신 말씀은 구약의 이집트 탈출과 바빌론 유배 때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하느님 의지의 연장입니다(신명 30,3; 이사 11,12; 예레 31,10 참조). 이제 당신의 몸을 나누는 일에 참여한 모든 것들은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고 그분께 붙어 가치를 보장받습니다. 이렇게 주님이라는 생명나무(창세 2,9)에 붙은 나무들은 저승 깊은 곳까지 모든 이들에게 뻗어 있는, 뿌리 깊은 십자가 고목으로부터 성체라는 양분과 성혈이라는 수액을 나눠 받으며 진정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세계 조부모와 노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과 우리 모두가 참포도나무의 가지(요한 15,1-5)로 초대되어 좋은 소출을 낼 수 있길 바랍니다. 고목의 가치를 망각한 채 세상 사람들이 집착하는 어리고 화려한 모습으로 설익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빛과 생명을 주시는 분과 일치하여 가치 있는 열매를 맺고 제공할 줄 아는 좋은 포도나무가 될 수 있기를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