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옷을 벗지 않고 속옷을 벗는 방법이 있을까? 없다. 속옷은 입을 때는 가장 먼저 입지만 벗을 때는 가장 뒤에 벗는다. 교만에 관한 비유다. 목줄이 없는 어떤 강아지가 두 친구 사이로 함께 걷고 있는데 제삼자가 그 강아지의 주인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두 친구가 헤어질 때 알 수 있다. 이 글귀들은 흥미도 있으면서 삶의 교훈까지 담고 있다. “칠극”이라는 책 내용의 일부다. 천주실의보다 그 명성이 빛나지 못하여 지금은 잊힌 고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이끌었던 것은 칠극이었다. 칠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앙과 삶의 지침서라 할 수 있겠다. 하여 이 책을 소개해본다.
칠극은 천주실의의 저자 마태오 릿치(1552~1610)와 함께 북경에 천주교를 전파했던 스페인 출신의 판또하 신부(1571~1618)가 쓴 책이다. 죄의 근원인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인색, 음란, 게으름을 경계하여 구원(유학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에 이를 수 있는 삶의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어떤 의미에서 재미없는 윤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식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재미나는 이야기들로 풀어주고 있다. 더군다나 많은 성인과 교부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어 그 주제들이 풍요롭게 펼쳐지는 점 또한 묘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실의가 하나의 도그마라면, 따라서 사물의 이치와 원리(격물치지)를 연구하던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천주교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거대한학문체계로 다가올 수 있었다면, 칠극은 기독교의 수양론에 해당하는 책이었다. 예컨대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순교자들이 단순히 신앙만으로 순교했을까? 마음과 열정만으로? 아니다. 그 배경에는 몸 속 깊이 배어 있던 삶의 지침서가 있었다. 바로 칠극이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7개의 죄의 근원을 극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죽음의 문턱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믿음만으로 순교를 강요하지 말도록 하자. 그러니 이 책을 다시 펼쳐보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이 책은 1614년 간행된 이래, 여러 판을 거듭했다. 또한 여러 사람이 서문을 적었다. 처음은 “칠극서”다. 명나라 정이위가 쓴 서문이다. 그는 칠극이 유학의 극기복례, 곧 헛된 생각을 제거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는 주정의 수행법(송나라 주돈)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이 서문을 남겼다. 남주의 웅명우가 쓴 “칠극인”이라는 서문도 있다. 그는 칠극이 유학의 깊은 가르침을 닮고 있고 하늘의 높은 이치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인 글이어서 이 책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고 평했다. 이 외에도 여러 서문들이 있다.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고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신앙과 윤리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이 둘은 거의 별거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신앙의 전통과 풍요로움을 다시금 회복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