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소싯적에는 내가 오늘처럼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어느덧 육십령 고개를 훌쩍 넘어가며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노인티를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조상님들이 사시던 백 년 된 시골집을 이리저리 손을 봐 5도 2촌 살이를 한 지 삼 년째 되는가 보다. 시골집 울안에는 두 개의 작은 밭이 있고 대문 밖에는 그보다 큰 밭이 품을 내주고 있다. 그 밭은 땀 흘린 만큼 먹거리를 충실히 대주는 믿음직한 친구가 되었다.
남편은 퇴직 후 장래가 유망한 텃밭 농부가 되었다. 동영상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농사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나는 가끔 감동을 받기도 한다. 손자가 좋아하는 보라색 찰옥수수와 브로콜리를 위해, 김장 고추를 병없이 키우기 위해, 밭은 그의 새 일터가 되었다. 농사를 짓다 보니 유독 작물이 잘 되는 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 밭은 항시 촉촉하고 기름져 고추도 배추도 호박도 다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듯하다. 올여름 그 밭의 소출인 열무로 마을 잔치를 했고, 올 가을엔 호박 풍년이 들어 이집 저집에서 호박지짐 냄새가 고소하게 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농부는 무엇이든 그 밭에 심으면 다 잘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TV에서 가진 것을 다 팔아 밭을 산 사람의 다큐를 보게 되었다. 평생 괴테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전 재산과 바꾼 3,200평의 땅에 괴테 마을을 일구는 이야기였는데, 정작 본인은 0.8평의 매우 작은 행랑채에 살고 있었다. 독일에서 강연을 할 때 괴테 동산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생면부지의 독일인이 두툼한 봉투를 주었다는 일화를 비롯하여 익명의 도움들 덕분에 책을 읽고 싶은 이들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일까? 다들 한 평의 땅이라도 더 얻고 확보하려는 사람들 속에서 ‘땀 흘려 풀 뽑다 바람 한 점 지나가면 너무 고맙지요.’하고 빙그레 웃는 그분은 보통 사람이 아닌 걸까?
인생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의 경작이다. 맘에 안 든다고 중간에 갈아엎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잘 가꿔야 하지 않는가. 인생 경작은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지난 10월 27일 주일,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교구청에서 ‘제13회 교구 성경잔치’가 열렸다. 나무과 잔디에는 가을색이 칠해지기 시작하여, 굳이 꾸미지 않아도 이미 훌륭한 무대인 하느님의 작품에 안긴 850여 명의 교우들은 성경을 읽고, 쓰고, 공부하고, 그리고 만들고, 색칠하는 찬미의 잔치를 벌였다. 그곳은 분명 좋은 밭이었다. 남들은 무엇을 가졌나 궁금하지 않고, 남보다 하나 더 챙기려고 하지 않고, 무슨 수를 안 써도 살아지는구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거두고 그분의 가르침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허리 굽혀 일하다 바람 한 점 지나가면 너무 고마운 사람들이다.
초보 농부는 궁금한 게 많다. 뒷집 할머니께 “고구마 모종 언제 하나요?”하고 물으면 “내 하거들랑 해라.” 하시고, “배추는 언제 심나요?” 하고 물으면 “내 심거들랑 따라 심어라.”하며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올여름의 뜨거운 날씨는 고구마 모종도 배추 모종도 할머니의 가르침에 따랐건만 고사의고비를 여러 번 넘기게 했다.농부에게도 인생 경작을 잘하고 싶은 이에게도 지혜는 등대가 된다. 잘 배우고 잘 살고 싶다. 지혜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지혜서를 펼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