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꽃다발보다 식빵 한 다발

posted May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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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수영 베아트리체 시인 / 가톨릭문인회

식빵.jpg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구절을 읽으며 나에게도 ‘힘들이지 않고 툭! 공기를 편안하게 바꿔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제가 남에게 해 주고 싶은 바람이기도 했죠. 생각해 보니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중 한 분을 감사한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그분의 별명은 ‘식빵맨’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8년째 근무하는 동안 전시가 바뀔 때마다 개막식, 전시 초반, 전시 중반, 전시 마지막 날까지 적어도 4번은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식빵맨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분의 책가방 안에는 늘 하얀 우유식빵이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날 때 강사에게, 혹은 전시 개막식이 마무리될 때쯤 전시기획자에게, 또 전시해설이 끝날 때 전시해설사에게 선물로 식빵 한 봉지를 건넵니다. 처음에 식빵을 받을 땐 선물을 받는 자체가 그저 감사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나중에는 궁금했습니다. ‘왜 항상 하얀 식빵일까, 두껍지도 얇지도 않고 적당한 이 빵을 늘 어디서 샀을까?’ 한 번은 식빵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직접 물어보았더니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반면 이름, 나이, 사는 동네, 학교, 전공 같은 개인적인 질문은 대답을 잘해주시더군요.

 

식빵맨은 저의 전시해설에도 자주 참석했습니다. 전시해설을 하다 보면 어떤 날은 박수를 많이 받을 때도 있는데 그때의 식빵맨 표정은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 감독과 코치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죠. 또 어떤 날은 관객의 무표정이 집중의 무표정인지,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무표정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집중을 살짝만 놓쳐도 말의 순서가 뒤바뀌면서 꼬여버릴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땐 ‘그래도 식빵맨처럼 꾸준히 찾아와 주시는 분이 있으니 걱정 말고 집중하자.’ 생각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식빵맨의 선물에 어제는 딸기잼을 발라 먹고, 오늘은 치즈를 올려 먹으며 또 생각합니다. 왜 항상 식빵을 선물하는지. 정답은 아직 못 들었지만, 저만의 해답은 찾은 것 같습니다.

 

저는 하얀 식빵이고 그 위에 발라먹고 얹어 먹는 모든 것은 다양한 예술작품이자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빵맨이(고생스럽게도 한 시간을 넘게 대중교통을 타고 와서 힘들이지 않은 듯) 툭! 건네준 여러 번의 식빵 한 다발은 ‘보람찰 때도, 떨릴 때도, 부담스러울 때도, 포근할 때도 있을 앞으로의 너의 여정을 기대하고 변함없이 함께할 테니 (기운 없을 때 먹을 수도 있는) 빈 스케치북을 너만의 색으로 물 들여봐.’ 라고 말해주는 듯한 응원의 맛이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편안함은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데 고수가 된 누군가의 오랜 정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