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부끄러움을 장작삼아

posted Jul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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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짜를 참 좋아한다. 마트에 가면 시식을 거절한 적이 없고 샘플도 일단 받아온다. 그래서인지 몇 해 전 본당에서 오경필사노트를 나눠줬을 때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온 후 허리디스크로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봉헌하겠다며 필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만 미뤄도 몇 장이나 밀려서 진도를 따라잡기 힘들었고 아무리 적어도 창세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속도에 점점 지쳐가다가 결국 필사노트는 책상 가운데에서 책장 끝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필사노트를 다시 꺼내게 된 과정에 대한 것이다.

현재 육아휴직을 하고 있는 나는 이 시기에 뭔가를 배우고 싶었고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집에서 노트북으로 한국사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큰 별 최태성 선생님은 첫 시간에 한 번의 인생, 한 번의 젊음을 어떻게 쓸 것인지 물었고 선사시대 강의에서는 자연 앞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함께 잘 살아보려 했던 노력의 증거를 통해서 각 시대마다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 ‘노력의 증거’라는 말에서(다소 엉뚱하지만) 6일 동안 쉬지 않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노고가 떠올랐던 건 아무리 적어도 끝이 없는, 그렇다고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필사의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창세기여서 그랬을까?

 

그리고 고려시대 강의에서는 총 81,258장의 목판에 84,000개의 부처님 가르침을 새긴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인사로 옮길 때 삼 보에 한 번씩 절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되어 그 정성에 감탄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필사노트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일상생활과 접점이 없는 지역명과 쏟아지듯 나오는 이름들, 또 별도의 해설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항상 어렵다. 그렇다 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루하루 기록하며 봉헌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기 위해 좀 더 애쓰고 좀 더 적응해보려 했던 노력의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장을 넘길수록 악필로 채워진 자리에 물까지 쏟아 뒷장은 약간 찢어진 노트를 보며 ‘내가 이런 마음으로 뭔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빌었단 말인가?’라는 부끄러움에 머리끝까지 푹 잠기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필사노트를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곁에 두고 나의 부끄러움을 장작삼아 열심히 태우듯 매일 한 줄이라도 반듯하게 적어나간다면 언젠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 더 알게 되고 친구를 위한 필사봉헌도 경건히 드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