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신앙

고통 속에서 찾는 응답-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

posted Sep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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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 앞날이 창창하던 아들이 갑자기 사고로 죽었다. 귀하디 귀한 외아들이자 엄마의 자랑이던 아들이었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작가가 통곡으로 써 내려간 일기 형식의 글이다. 

 

그 당시 박완서는 ‘자식 삼켜먹은 에미’라는 등 뒤의 수군거림이 들리는 듯하여 사람들의 조의도, 방문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자식을 잡아먹고도 살겠다고 음식을 먹는 자신이 모멸스러워 먹는 대로 다 토해낼 정도로 극한의 고통 속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앞에 놓고도 그러한 기도가 나올까?

 

그래, 나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 돼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어머니 박완서의 상태가 위급하다고 판단한 딸은 부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시고 온다. 딸 집에 기거하는 동안 박완서는 마음 놓고 울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작가는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 그래서 마음 놓고 몸부림치며 짐승 같은 울음을 내지를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다. 그래서 오랜 지인인 이해인 수녀의 제안으로 부산 분도 수녀원에 머물게 된다.  

 

작가가 수녀원에 머물기로 결심한 이유는 ‘참척’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괴로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그에 대한 하느님의 해명을 듣고 싶어서다. 말하자면 하느님께 따지기 위해서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한 마디 말씀이 기적처럼 들려오고, 그 기적의 말씀으로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신비 체험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극한의 고통 상태에서 ‘한 말씀’의 치유 능력을 기대하고 기도에만 매달리기엔 내 고통이 너무 크다. 그래서 작가가 하는 기도는 왜 이런 큰 고통을 주는지 답해 달라는 것, 나아가 내가 이렇게 기도할 테니 ‘더 이상’ 남은 가족에게는 해코지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하느님과의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가장 인간적이면서 서글픈 거래, 그게 극한의 고통 속에 있었던 당시의 작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였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에 대한 응답, 그토록 원하던 하느님의 ‘한 말씀’은 너무나 의외의 순간에 듣게 된다. 자신이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일화라면서 한 어린 수녀님이 이야기하는, 정말 사소한 한 경험담에서 작가는 주님의 ‘한 말씀’을 듣는다. 

 

수녀님 집에서는 그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하루도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수녀님은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하며 비관도 하고 원망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 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 안 되란 법이 어디 있나?’라고 생각을 고쳐먹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되더라는 이야기이다. 

 

박완서는 ‘왜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와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간발의 차이 같지만 실은 사고의 대전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주님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라고 원망할 게 아니라 ‘왜 나라고 이런 고통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라고 바꾸어 생각하면 될 일이다. ‘내가 뭐 관대…’라면서 나의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박완서가 그 크나큰 고통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게 한 ‘한 말씀’이었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박완서의 마지막 기도는 다시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보석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 시대의 아름다운 작가 박완서를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작가가 그토록 갈구한 주님의 ‘한 말씀’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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