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전사前史 재수록 8

posted Mar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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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사001.jpg

 

마산교구 전사前史 8


명례본당(3)
명례明禮란 신라 법흥왕이 이곳 사람들의 예의 밝음을 칭송하며 하사한 이름이라 한다. 일찍부터 낙동강의 평화스러운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피난 교우들이 별 마찰 없이 모이고 훗날 성당까지 지을 수 있었던 숨은 배경이다.


명례본당은 경상도 네 번째 본당이다. 1886년 대구본당, 1890년 부산본당, 1894년 가실(왜관)본당, 그리고 1897년 명례본당이다. 임시 본당이란 조건이 제시되었지만 어떻든 정식으로 발령받은 신부가 7년간 사목했던 곳이다. 마산교구로선 잊을 수 없는 본당이다.


경남의 첫 본당은 부산본당으로 1890년 절영도(現 영도)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 있던 조내기潮落里공소가 모체다. 초대 주임은 파리외방전교회 조죠(Jozean 조득하) 신부로 25살 젊은 나이에 부임했다. 지금의 청학성당 수녀원 자리에 초가집을 짓고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경남의 흩어진 공소를 돌봤다. 


일 년이 지나자 조죠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한다. 섬 안에 고립되어 있었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서도 부산항 중심지로 옮겨야 했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초량草梁에 대지를 마련하고 본당을 이전했다. 초량본당의 출발이다(1891년).


당시 부산본당 관할은 넓었다. 동으론 울산과 경주지역이었고 서쪽으론 밀양과 양산지역, 함안과 진주지역, 고성과 통영지역 그리고 거제도까지 갔다. 판공성사로 공소 방문을 하려면 시간과 체력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경남 중부지역에 본당을 신설해 서쪽지방 공소들을 전담시키고 싶어 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밀양 인근 공소들이 들뜨기 시작했다. 신부를 모신 본당으로 승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본당 후보지로 압축된 곳은 밀양, 명례, 웁실(삼랑진) 세 곳이었다. 


한편 정보를 입수한 명례공소는 120냥을 주고 세 칸짜리 집을 샀다. 본당 승격을 대비해 사제관을 마련했던 것이다. 어떤 언질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본당은 명례로 선택되었다. 발령이 나자(1897년) 강성삼 신부는 곧바로 명례로 가려 했다. 하지만 구매했던 집을 주인이 비워 주지 않아 부득이 부산본당에서 해를 넘기고 1898년 1월 명례에 부임했다. 


강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명례본당 구역은 밀양과 양산, 언양과 경주지역뿐이었다. 진주와 함안, 통영과 거제도는 여전히 부산본당 구역이었다. 1900년이 되자 김해와 창원지역이 명례본당 소속으로 들어왔다. 


명례본당은 사라졌지만 맥을 잇는 본당이 삼랑진과 진영에 등장했다. 앞서 언급했듯 명례본당 설립엔 피난 교우들의 헌신이 묻어 있다. 밀양 단장으로 유배 왔던 김범우 순교자 후손들과 그들에 의해 입교한 교우들이다. 한편 김범우 묘소가 있음을 알고 이왕 숨어 지낼 바에야 순교자 무덤 근처로 가자는 의도에서 밀양과 양산 인근으로 들어온 교우들도 있었다.


소백산맥 남단 일대의 신불산, 능동산, 고헌산, 대운산, 관월산 등을 무대로 피난 교우들은 곳곳에 모여 살았다. 그들은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갔다. 이들의 만남이 공소로 발전하였고 그들을 흡수해 만들어진 첫 본당이 명례본당이었던 것이다.


1926년 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던 권영조權永兆 신부는 기와로 된 성당을 지어 낙성식을 가졌다(1928년). 하지만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이다. 지금의 명례성지 자리는 원래 낙동강물이 휘돌아 가며 부딪치던 언덕이었다. 2009년부터 실시했던 4대강 사업 결과로 육지에 솟은 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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