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산(Since 1905)

by 관리자 posted Nov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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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761-5453
팩스 761-5456
주소 52832 진주시 문산읍 소문길67번길 9-4
홈페이지 http://catholicmunsan.or.kr/

  문산(文山) 본당은 마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1905년 9월 22일 마산(현 완월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이다. 설립 당시에는 소촌(召村) 본당이었으나, 1913년 무렵부터 현재의 본당명으로 개칭되었다. 전사 및 공소 시대 지금의 진주 · 함안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였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함께 1865년경 거제도를 방문한 함안(咸安) 출신의 구한선(타대오)이 이듬해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면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는데, 진주 문산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바로 박해 전 구한선에 의해서였다. 이곳의 신자 집단은 박해 후 다시 교우촌으로 재건되었으며, 1883년에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의 방문으로 소촌(召村, 현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소촌 공소는 그 후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에 부산 절영도(絶影島)에 정착하면서 부산 본당(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899년 6월 부산 본당 3대 주임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진주(晋州) 본당을 설립하면서 이 본당 관할이 되었다. 당시 진주 본당 신자수는 1,054명이었는데, 그중에 소촌 공소 신자수가 156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후 타케 신부는 1900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馬山浦)로 가서 마산 본당을 설립하였고, 소촌 공소는 다시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 타케 신부는 마산에 정착한 지 1년 10개월 만인 1902년 4월 20일에 제주도로 전임되었고, 대신 제주도에 있던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같은 날 마산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본당 설립과 초기 현황 1904년 무렵 소촌 공소 신자수는 160명에 달하였다. 이에 무세 신부는 본당 분할을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요청하였고, 뮈텔 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 입국한 줄리앙(M. Julien, 權裕良) 마리오 신부를 1905년 9월 22일자로 무세 신부의 보좌로 임명하였다. 그에 앞서 무세 신부는 이미 마산 본당 관할 중에서 소촌 지역을 분리하여 새로 본당을 설립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줄리앙 신부의 임명은 곧 소촌 본당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산에 도착한 줄리앙 신부는 즉시 소촌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1월에 가서야 삼곡리(三谷里)에 초가 세 채를 매입하고 임시 성당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새 성당 부지를 물색한 끝에 1907년 소문리의 현 성당 부지 2,400평과 조선 시대 때 찰방 관서(察訪官署)였던 기와집 10여 채를 매입하고 성당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08년 9월 29일 새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줄리앙 신부는 1909년 봄에 부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부임 이듬해 전교 및 지역 계몽 사업의 일환으로 배명학교(培命學校, 1926년 폐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명성이 널리 알려져 멀리 통영, 거제, 사천, 곤양, 함안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으며, 1915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긍련회(矜憐會)를, 그 이듬해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이때까지 성당은 찰방 관서 건물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400여 년 된 노후 건물이라 더 이상의 보수가 어려워짐에 따라 3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 재임시인 1923년 11월 23일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으며, 기존의 배명학교와 유치원, 신자들의 사랑방을 중수 개축하였다. 1923년에 신축된 성당은 정면 6칸에 우측면 4칸, 좌측면이 3칸으로 된 장축형 평면의 전통 한옥 양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건축용 목재나 기와를 구하기 어려워 경남 고성의 어느 사찰을 헐어내고 나온 자재를 이용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중앙 통로 양쪽으로 건물을 지지하는 13개의 원형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기둥에 사용할 만한 긴 목재가 부족했던 탓인지 어떤 것은 짧은 목재기둥을 장부맞춤으로 연결해 길이를 연장했다. 연결부는 구멍을 파서 나무쐐기를 박아 고정했는데 투박한 모양새와는 다르게 아주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다. 1920년대 문산 본당은 경남 및 전남 지역의 관할 공소만 무려 97개소에 달해 공소 순회 기간만 7개월 이상이 소요되었으므로 공소 담당 전교 회장을 따로 임명하여 사목의 효율화를 도모하였고, 무의탁 행려노인들을 위한 고조원(孤助院)을 설립하여 지역 복지 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8년경 본당 단체로는 전교회, 성모 부인회, 공교 소년회(公敎少年會), 호상계(護喪契), 가톨릭 오시(五時) 품꾼회 등이 있었다. 이어 5대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 재임시인 1932년 5월 29일에는 3천여 명이 참가한 진주 지역 최초의 성체 거동을 문산 본당에서 거행하였으며, 교세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1935년 8월 22일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37년 5월 6일 성당과 사제관 · 수녀원을 건립하고 기존의 한옥 성당은 유치원 강당으로 이용했다. 새 성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과 벽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 서양식 건물로 10m × 37m의 긴 장축형 평면으로 세워졌다. 정면에 뾰족한 종탑을 세운 성당은 19세기 고딕 부활(Gothic Revival)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고 있다. 서양식 건축양식을 당시 여건에 맞춰 재해석해 설계 시공한 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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