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연혁

1. 서부 경남의 복음 경로

1827년 2월에 전남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호남지방의 천주교를 황폐화시켰다.

호남 신자들은 전라도를 떠나 경남 서부 지방으로 넘어 오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지리산과 덕유산에 가로막혀 사람들의 왕래마저 흔하지 않던 지역이라 신자들이 숨어 들어와도 전혀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정해년의 모진 추위와 여름 가뭄으로 덕유산 일대에서 화전(火田)을 하며 숨어 있던 신자들은 그 해 겨울 많이도 얼어죽고 굶어 죽었다. 그래서 따뜻한 봄이 되자 그들은 민가를 찾아 흩어지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산청군 단성을 거쳐 진양 문산, 사봉, 반성, 사천 배춘, 곤양, 서포, 고성 기월리, 황리, 통영 쪽으로 내려갔고 일부는 안의를 거쳐 거창, 신원, 합천 삼가, 의령 신반, 낙서, 창녕, 수개, 증산을 거쳐 낙동강을 따라 내려갔다. 또 한 쪽은 함양, 산청, 단성을 지나 하동 옥종, 북천, 진교, 양포 쪽의 바닷가로 더러는 남해의 섬으로 흩어졌다. (아래 표와 그림 참조)

 
<복음전파>
출신도 박해 및 1차 피난처 박해 및 2차 피난처 귀착지
박해 피난처 박해 피난처 박해 귀착지
경기도
지방
기해, 병오 문경, 예천, 상주 대구, 칠곡, 성주 밀양, 김해, 양산
충청도
지방
신유, 충청도 교난 청송, 영양, 안동, 진보 함안, 진주, 고성 서부경남 일대
전라도
지방
전라지방 교난 진안, 장수, 무주 함안, 진주, 고성 서부경남 일대
<경남 인근 복음 전파 경로>


 
 
 
2. 로베르 신부의 포교 활동

정해박해 전의 조선은 안동 김씨 세력 하에 있었으며 그들은 막강한 청치 세력을 형성하여 실권과 이득을 챙긴 결과 경제가 피폐(疲弊)되고 민생은 도탄(塗炭)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둑이 성행하고 흉년이 들면 예사로 굶어 죽게 되었다. 자연히 떠돌아 다니는 사람도 많아졌고 교우들도 남쪽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1860년경에는 전국에 153개의 교우촌이 있었고 그 중서부 경남에는 8개의 교우촌이 있었는데 거제, 남해, 통영, 고성(黃理), 사천(培春), 진주(文山), 칠원, 의령(新反) 등에 있었다. 1861년 리델(Felixclair Ridel) 신부가 입국하여 최양업 신부 후임으로 경상도 지방 포교를 담당하였고 1869년에 제 6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기에 이르며 리델 신부는 이 지방의 교우촌을 알 수 있는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우촌도 병인박해 (1866년), 무진박해(1868년) 때에 거의 사라지게 된다. 대원군이 죽고 한.불 수호조약 체결 이후 경상도 지방에 다시 로베르(Achilloe Rovert) 신부에 의해 포교 활동이 시작되는데 그는 1877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에 입국하여 산간 벽지로 숨어 다니며 헌신적으로 포교 활동을 한다. 그는 1886년 왜관 산나무골에 부임하여 경상도 여러 공소를 관장하기도 하고 특히 1887년에는 거제도 옥포 공소까지 가서 순교자 윤봉문의 처가 식구에게 세례성사를 베풀기도 하였다.

 
 
 
3. 부산 본당의 설립

1893년에 부산에 본당이 설립되어 조조(Joieau) 신부에 이어 우도(Oudot)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하셨다. 우도 신부는 서부 경남과 거제도 그리고 부산, 양산, 울산으로 흩어진 공소들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일년의 절반 이상을 판공성사를 위해 본당을 비워야 했었다. 그래서 신부를 돕기 위하여 1897년 6월 9일 강성삼(姜聖蔘) 노렌죠 신부가 보좌 신부 격으로 부산에 부임하게 된다. 강신부는 1897년 4월 26일 서울에서 뮈델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았으며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은 우리나라 세 번째 사제였다. 그러나 강신부는 바닷바람을 견딜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으므로 부득이 공소에 쉬면서 요양을 해야 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들 은 밀양의 명례공소 교우들은 120냥의 돈을 주고 세 칸 짜리 집을 사제관으로 미리 사게되는데 이렇게 해서 임시 본당은 명례로 정해지고 강신부는 발령을 받고 가려 했으나 집주인이 집을 비워 주지 않아 부득이 다음 해에 부임하게 된다. 강신부를 맞이하여 명례 본당은 활기를 띄게 되나 병약했던 강신부가 부임한지 6년만인 1903년 9월 19일 38세를 일기로 명례에서 선종을 하게 된다.

그러자 명례 본당은 다시 공소로 되어 마산포 본당 관할에 들어가지만 1916년에 성당 건물을 지어 명례 천주 당이라는 이름으로 교구의 인가를 받기도 하는 열성을 보인다. 명례 공소는 지금은 진영 본당에 소속되어 있다.

 
 
 
4. 진주 본당 설립의 노력

경남지역의 공소가 광활해지자 새로운 본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처음 본당을 세우고자 했돈 곳이 진 주였다. 진주는 1895년 진주부 승격 이후 관찰사가 거주하는 경남의 중심 도시였다. 따라서 신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진주에 신부 모시길 원하였고 1897년 11월 경엔 집 한채를 마련하여 이를 주교께 보고하였다(뮈델 문서 1898-147). 그래서 신자들은 1898년 사제 피정 뒤에 새 신부가 부임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오시지 않자 진주지역 신자들은 1898년 7월 21일자로 주교님께 탄원서를 내어 신부 한 분을 보내 주길 빌며 신부 영입 운동을 펼쳤는데 (뮈델문서 1897-151) 장재, 문산, 삼가, 원당, 곤양 공소 등이 중심이었다. 이를 알게된 부산본당의 따께(Emile Taquet) 신부는 진주 본당의 신설을 역설하면서 자신이 진주에 갈 것을 자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899년 6월 성신강림축일 전날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며 진주에 부임한 따께 신부는 교우들이 장만한 집 이웃에 3백냥을 주고 또 다른 집을 매입하여 옛 집은 성당으로 새 집은 사제관으로 개조하여 거주하게 된다. 그러나 진주에서도 따께 신부는 1년밖에 머물지 못했는데 그동안 여러 사건을 겪었다. 우선 그가 부임하자 교우들과 주민들은 매우 환영하였다. 특히 주민들은 서양인이 오니까 관의 횡포를 막아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의 망나니들과 아전들은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신부를 괴롭혔다. 다께 신부가 뮈텔 주교께 보낸 1899년 7월 28일자 편지에 의하면 아전들이 범죄자를 잡는다는 구실로 사제관을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사건도 있었고 신부를 도와 복사일을 보던 김윤중이란 사람이 부랑배와 합세하여 사기를 치다 관헌에 잡혀 교회의 체면을 깎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뮈텔문서 1899-196). 여하튼 진주에서 1년을 보낸 따께 신부는 본당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주교께 아뢰었다. 진주본당 신자의 대부분은 공소 신자였지 자체 신자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김윤중 사건으로 교회는 신망을 잃었고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또 진주성당은 술집과 접대부와 아전들만이 사는 나쁜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다 건물이 낡아 위험한데 수리하려면 2백 원이란 엄청난 돈이 든다(뮈텔문서 1900-8). 이런 여러 이유를 합하여 따께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하고 후보지 물색에 나섰다. 처음에는 소촌공소(지금의 문산본당)를 생각했지만 결국 마산으로 본당을 옮기게 된다. 부임한 지 1년만에 여러 사정으로 마산으로 본당을 옮기게 된다. 부임한지 1년 만에 여러 사정으로 마산으로 본당을 옮기게 되고 진주는 다시 공소로 남게 되었다가 1925년에 가서야 본당으로 승격하게 된다.

 
 
 

5. 마산교구의 태동

마산은 1898년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외국인에 대한 반감도 적었다. 따께 신부는 우선 임시로 조선인들이 많은 구마산 쪽에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교우 김달시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의 오동동 고려호텔 근처였고 큰 포도밭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신마산과 구마산 사이인 범골(지금의 완월동) 산자락에 더 큰집을 짓게 된다.

따께 신부는 임시 거처로 한국인 촌에 작은 집을 사려했지만 일본인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집값이 엄청나게 올라 6백냥에 헛간이 붙은 다섯 간 짜리 집 한 채를 겨우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뮈텔문서 1900-54). 따께 신부가 기록한 1900-년에 교세통계표(부산교구 30년사 p.188)에 의하면 당시 그가 맡았던 공소는 24개였고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진주의 비라실, 원당, 대내, 배춘, 소춘, 시정골, 소촌 남산, 곰실, 양전리, 곤양의 양개, 고성의 틈실, 장동, 계동, 황리, 통영의 읍내, 거제의 명진, 의금이, 문골, 저산, 진목정, 함안의 말산, 산익동, 가등이, 동박골, 삼가의 고무정이었다. 그리고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신자 수는 모두 1,054명이었고 예비자만도 393 명이나 있었다.

한편 명례의 강성삼 신부가 담당한 공소는 밀양의 명례를 위시하여 웁실, 정성동, 김해의 봉림, 노루목, 모산, 창원의 곡목, 칠원의 죽청 등 8개였고 신자 수는 366명이었다. 1902년에 따께 신부가 제주도로 옮기고 도리어 제주민란을 피해 온 제르만 뭇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대구교구(제 2대 교구장)로 이동할 때까지 9년 간 밀양, 창원, 함안, 진주, 통영, 거제 등지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1910년에는 오늘의 성지여중고의 모체가 되는 성지학원 설립을 하는 공헌을 남기기도 한다. 3대 주임 까넬간 신부에 이어 4대 주임 유리오 베로몬 목 세영 신부는 29년 간이라는 오랜 세월을 울 지역에서 봉사 헌신하였다. 그는 1930년에 남성동 본당을 태동시킨 분이기도 하다.

대구교구 관할이던 마산 지산 산역은 부산교구에 소속되어 있던 중 1966년 2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마산교구를 분리 설정하여 인준하심에 따라 교구로 승격되어 5월 31일에 초대 교구장으로 김수환(스테파노) 주교의 착좌식을 거행한 후 장병화(요셉) 주교를 거쳐 1989년부터 2002년까지 박정일(미카엘) 주교께서 3대 교구장으로, 2002년부터 2016년까지 안명옥(프란치스코 하비에르)주교께서 4대교구장으로, 2016년부터 2022년까지 배기현(콘스탄틴)주교께서 5대교구장으로 마산교구를 이끄셨고 현재는 신은근(바오로)신부님께서 마산교구장 서리로 활동하고 계시다.

 

현재 마산교구의 본당은 준본당 1곳을 포함하여 모두 74개이며 조선교구 시절에 완월(1900), 문산(1905), 본당이 신설되었고, 대구교구 시절에 함양(1913), 옥봉동·옥포(1926), 태평동(1929), 남성동(1930), 합천(1932), 함안(1933), 거제·진영(1935), 장재동(1938), 고성(1939), 거창(1940), 중앙동(1946), 창녕(1949), 장승포(1953),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부산교구때 삼천포(1957), 성심원(준)(1959), 남해 (1961), 사천(1962), 월남(1964), 칠암·경화동·산청·하동(1965), 의령(1966)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마산교구 출발 후 상남동(1966), 대산(1967), 중동(1971), 양덕동·고현(1975), 봉곡동·가음동(1977), 남지·상평동·여좌동·칠원(1979), 산호동(1980), 반송·양곡·회원동(1981), 대건(1985), 하대동·구암동(1986), 사파동(1989), 진교(1990), 석전동·명서동·호계·신안동(1991) 본당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지세포·덕산동(1992), 북신·장평·진동(1993)본당 등이 설립되고, 수산(1996), 월영(1998), 진례(1998준본당-2009본당승격), 용잠(1998준본당-1999본당승격), 망경동(1998), 대방동(2000), 삼계(2004), 신월동·창원상남동·토월(2005), 팔용동·서포선교·용원(2007), 금산·안의선교(2008), 생림선교(2009), 가좌동(2010), 사림동(2014), 하청(2014), 평거동(2019), 영산(2021), 장등(2022) 설립으로 오늘에 이른다.

 

2023년 4월 5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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