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4.08.29 11:02

냉담과 열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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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준호 라파엘 수필가/ 가톨릭문인회

냉담과 열정사이.jpg

냉담의 시간이 길수록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부끄럽게도 나의 이삼십 대는 그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돌아와 있었다. 우연히 운명의 배를 탔고 은총의 노를 저었다. 이는 어렴풋한 직감이었는데 요즘 들어 더욱 실감하게 된다. 한 번씩 아침 미사에 달려가는 어린 나를 상상한다. 초등학생 때 잠이 참 많던 아이였는데, 당번 날이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성당으로 달 렸다. 제의실 장미 향기는 밤하늘의 별처럼 다가왔다. 신부님 방의 초콜릿은 달콤했다. 종교 생활에 열정적이진 못해도 막연한 방향감은 있었나 보다. 젊어서는 무엇에 홀린 듯 돌아다녔다.


나는 여행 사진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냉담 시절에도 성지를 제법 다니며 사진을 찍었 다. 머나먼 전도 길에 토마스 사도가 닿은 인도의 끝자락이 펼쳐진다. 나도 며칠을 인내하며 벵골 만의 높은 파도 앞 성 토마스 성당에 도착했다. 문득 몬세라트 수도원의 검은 성모상 사진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나에게 묻는다. 거긴 왜 갔나? 겨울 밤하늘의 별 하나 보았을까? 밤 기차에서 강도를 만났고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가닿았다. 아까워 낮에도 보고 밤에도 보았다. 다시 안개 낀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 사진으로 넘어간다. 꿈만 같은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피렌체 로 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등장했던 두오모 쿠폴라 위에 마지막으로 섰다. 어떤 힘에 이 끌려 성지순례가 되어버린 그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열정은 너무 뜨겁고 냉담은 손쉬워 얼음 위에서 마구 넘어지던 여행이었다. 아파도 아픈 줄 몰랐 다. 현재의 나는 냉담과 열정의 사이 어디쯤 있을까? 물음은 긴 여운을 남긴다.

 

여행은 남는 게 사진이라 하지만 반추의 물음을 남긴다. 여행은 성찰과 벗하게 되며 순례는 묵 상을 떠날 수 없다. 우리네 인생을 닮은 여행은 가고 싶은 곳을 찾지만, 결국 돌아와야 하고, 그리워 하지만 결국 못 가게 된다. 늘 깨어있을 뿐이란 명제 하나만 남는다.

 

이제는 먼 곳을 가지 못하여 가까운 성지를 찾는다. 가장 인근의 성지는 복자 구한선 타대오 묘 소다. 지금은 대산성당의 무덤 경당으로 모셔 왔지만, 예전 평림리 가등산에 있었을 때도 여름 뙤약 볕을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오고 가며 자주 닿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냉담은 아니겠지만 열정 도 아닌 마음이 아직 진행 중이다. 이제 무덤 경당에 매주 간다.

 

2024년 첫 아침의 해를 보고 교적을 옮겼다. 자주 가던 성지가 나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여행 같던 성지순례, 냉담과 열정 사이에서 번지수 없던 여행이 있었다. 이제는 사진으로 말고, 일상의 열 정으로 마음속에 찍으려 한다. 주일 미사 속 평범한 열정을 장미꽃으로 피우리라. 일상이 열정과 벗 하여 시나브로 다가오길 기도한다. 눈을 뜨니 복자 구한선 타대오 묘소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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