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답에 동료 넷이 동네 어귀에 있는 밥집에서 담소(談笑)중에 K형제의 신앙적 지론(持論)이 귀 를 솔깃하게 한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먹고 마시고, 방귀도 뀌고 살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광야에서 40 일 동안 악마와 맞서서 오직 성령으로 이겨냈다고, 역설하였다. 문득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절실한 믿음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산천이 몇 번이나 변했을까? 처음에는 예수님도 우리 와 같은 사람일까? 조금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예수님은 신화적 존재로만 생각했던 것이 더 솔직하리라.
곧장 귀가하여 우리 성당 수녀님께 막막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예수님의 실존을 간단히 추려서 말할 때, 무엇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스스로 정리된 답이 없었다. 실지로 내 방에 걸어놓은 주교님의 성경필사 축복장을 쳐다보며, 참으로 쓸쓸하고 공허한 마음을 어찌하랴. 아무튼 수녀님의 권유로 복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마르코 복음의 첫 머리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이 “죄의 용서 를 위한 회개를 선포”(1.4) 하였고,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1.8). 예 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다”(1,12-13). “예수님은 성령으로 온갖 질병을 앓는 사람 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쫒아 내셨다”(1.34).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9.42-48). 이혼에 대해서 “하느님께 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 이처럼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16.1-8)과 승 천(16.19)에 이르기까지, 마음 짚이는 성구를 대강 추려보았다. 다시 구약의 10계명을 유념해 본다면, 부모님께 효도하여라(탈출 20,12; 신명5,16) 사람을 죽이지 마라(탈출 20,13; 신명 5,17) 도둑질을 하지마라(탈출 20,15; 신명 5,19) 등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 근본을 적고 있다. 부언하여 성경은 기원전 9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 약1,000년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고 우리는 배웠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된 논리로 공감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다면, 신앙인의 긍지가 아닌가.
한편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21세기 물질문명의 발전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경쟁사회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현대인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인간의 정서적 불안을 완화하고, 삶의 활기를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의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으랴. 다만 내 영혼에 감사하리라. 그러므로 세상을 즐겁게 살고, 지금 가진 기쁨을 만끽하리라. 그리하여 이승이 끝나는 날, 하느님께 가서 세상은 아름 다웠다고, 진정 살만한 곳이었다고 내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