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신앙인으로서 나를 돌아볼 때마다 하느님의 칭찬을 생각해 본다. 이웃의 칭찬은 간혹 얻어 보긴 했 어도, 그분의 칭찬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살아오다 보면, 경제적 어려움에 고생하시는 분들이나 뜻 하지 않게 찰나의 사고를 당하였거나 아니면, 태생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분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도와주면 그게 나를 위한 것이다.”라는 그 말씀을,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릴 적부터 그분의 말씀을 사사(師事)하다 세뇌되어, 태생적으로 장애아였던 같은 동네 처녀를 내 반려자로 함께 살다가 불행히 도 십오육 년 전 그분이 시키신 대로 다해 주지 못한 채 반려자는 먼저 세상을 버렸다. 삼십여 년 살아오던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와 고향의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곤 했는데, 어느 날 어릴 적 같이 복사 섰던 친구 가 내게 툭 던진 말 한마디. 그러니까 다른 무슨 꿍심 즉, 경제적 도움을 위해 ‘축구 반피’ 짓의 결혼 생활을 자처한 것 아니냐며 자신의 확증 편향적인 듯한 생각을 내게 말하였다. 아마 이 친구는 내 반려자의 친정 식구가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만 이 말을 들었던 그땐 참말로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장애인 반려자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보지 않았는데 어찌 그런 말을 그리 쉽게 할 수 있을까라고. 부모님과 친구들마저 나를 반대하였지만 그때의 나는 전혀 그런 반대를 개의치 않았다. 진심을 다해 도와가며 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신앙인이더라도 이렇게 다른 신앙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에 깨달았다.
자신의 삶보다 이웃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그런 ‘축구 반피’의 삶은 스스로 하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반드시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세뇌되지 않고서는 그런 신앙적 삶을 살기에는 이기(利己)가 자욱한 지금의 세상이 녹록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아닌 장애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내 친구처럼 오해를 할 수 있겠다 싶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고 순교하신 옛 어르신들도 그분들의 의지로써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 아닌, 죽음을 각오한 그분들만을 굳이 선택하신 것은, 그분의 말씀을 스스로 더 많이 세뇌시켜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자기와 다른 이웃 신자들의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더군다나 장애인과 같이 살아가는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들을 자신의 확증 편향적 신앙관이나 가치관으로 바라보지 않길 기도드린다.
요즘은 성당 가서 드리는 기도보다 집에서 드리는 TV 미사가 더 와 닿을 때가 있다. 성당 가는 발걸음이 뜸해져 내 신앙심이 찹찹해져 가는 것 같아, 옛적 작은방 동솥 앞에 쪼그려 식은 시락국을 따뜻하게 데우듯이 애를 써 봐야겠다. 남은 힘 다해 한 번 더 그분의 말씀에 세뇌되려 기도도 더 해야겠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잃어버린 기도도 되찾아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