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2025.02.27 10:08

육화1. 앎

조회 수 315
Extra Form
저자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희망의 징표 발견하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며,

있는 힘을 다하여 당신을 찾고, 알며,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항.

 

우리는 하느님 은총에서 희망을 찾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시대의 징표들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대로,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악과 폭력이 뒤덮었다고 생각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한한 선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현존이 필요한 인간 마음의 갈망을 포함하는 시대의 징표들이 희망의 징표들이 되어야 합니다. -희년 칙서 7항.

 

 

지식 아닌 앎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인간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서’ 당신께 응답하고,

당신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 교리서 52항 - 1베드 1,2.

 

신앙으로 사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그 삶은 기쁨 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은총과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가진 신앙이 ‘앎’이 아닌 ‘지식’에만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예비자 교리부터 시작하여 매 미사 때 들은 강론들, 그리고 성경 공부에 이르기까지, 많이 듣고 많이 알고 있다 여기지만, 내 존재를 뒤흔들어 하느님께로 방향잡게 하는 앎이 되지 못할 때 기쁨을 살지 못합니다. 냉담자들을 보고 안타까워하지만, 그들이나 자신이나 백지 한 장 차이일 뿐입니다. 근본이 허약하니 조금만 수틀리면 언제든 냉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열심한 성당돌이가 아닌 참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나를, 이웃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삶이고 기쁨의 원천입니다.

 

 

들은 ‘지식’으로 머물던 옛 계명, 성찰하여 ‘앎’으로 새겨진 새 계명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 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여라.

- 묵시 2,3-5.

 

요셉 라칭어(베네딕도 16세)는 1968년,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 가져야 할 신앙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이 바로 그 책입니다. 판이 거듭되면서 새로 짧은 머리말을 쓰기도 했지만 책 내용은 늘 그대로였습니다. 2000년에 나온 신판도 그렇습니다. 대신, “2000년 신판에 부쳐”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된 책 18쪽에 달하는 ‘긴 머리말’ 을 썼습니다. 백성의 삶을 다시 성찰한 이 머리말만으로도 같은 신앙이 새로워졌습니다.

탈출기에서 제시된 십계명이 신명기에서 다시 반복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변함없는 하느님 법을 대하는 백성의 태도가 새로워지고 깊어졌습니다. 옛 계명이지만, 백성에게 새 계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의 성찬례를 거행하는 이유, 단순히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을 현재화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늘 한결같으시고, 절대적 기억을 가지신 하느님과 달리, 그렇지 못한 우리, 망각하는 인간 스스로의 모습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구원의 ‘상수’시지만 인간은 늘 변하는 ‘변수’이며, 그래서 구원은,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인간 자신에게 달린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일과 사랑을, 하느님의 일만으로 기념하는 것을 넘어, 백성이 주인공 되어 그 일을 살려내고 살아내는 겁니다.

 

 

파악 아닌 깨달음, 정답 아닌 자세

 

2006년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르. 피부색, 인종, 종교가 다른 이 둘도 다른 여느 청년들처럼 요정 ‘진’을 찾아 모험의 길을 떠납니다. 숱한 도전자들이 실패한 난관들을 뚫고 다다른 마지막 관문, 이제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문 중, 어둠과 죽음의 방이 아닌 빛과 생명의 방을 선택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여태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둘 중 하나인데 왜 다들 실패했을까요? 이 둘이 선택해 들어간 방도 어둠의 방이었습니다. 아, 이제 우리도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그 방은 놀랍게도 빛의 방, 생명의 방으로 탈바꿈합니다.

 

사실 두 개의 문은 모두 하나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에 집착해 다른 이들을 경쟁자로만 여기며 남을 헤치고 온 사람들에게는 어둠과 죽음의 방이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까지도 상처 입은 친구를 버려두지 않고 함께 도착한 두 사람에게만 빛과 생명의 방입니다.

마지막 관문은, 둘 중 하나의 정답 선택이 아닌, 어느 쪽이든 존중하고 사랑하는, 살림의 자세를 깨달아 알고 선택하는 데 있었던 겁니다.

점집을 찾는 이와 하느님을 찾는 이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점집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정해진 답, 정해진 길을 묻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는 삶의 자세를 묻습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파악한 지식이 아닌, 삶 자체를 충실히 살아갈 깨달음의 자세를 추구합니다.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여당이니, 야당이니, 진보니, 보수니, 그 중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하나됨을 만들 수 있는 자세를 선택해야 합니다.

 

 

육화, 그리스도를 따라, 삶에 온전히

 

먹고 살기 위해 힘들게 일하고,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땅의 현실, 똑같은 그 현실이 옛 인간에게는 피하고 싶은 ‘벌’이었지만 새 아담이신 분께는 살아갈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력’으로가 아닌, 인간과 그들 삶에 온전히 들어오신 ‘육화’로써, 모든 이를 알고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우리, 그럼에도 온전히 세상과 이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내 삶에 진하게 육화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지만, 그분 말씀처럼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루카 5,4-5)야 합니다.

 

희망은, 금수저를 쥘 희망, 개천을 벗어날 희망이 아닌, 흙수저를 꼭 쥐고 개천을 열심히 기쁘게 살아갈 희망입니다.


  1. 신앙생활과 교회법(2)

    Date2025.04.10 Category교회법 Views84
    Read More
  2. 주님의 기도에 유감: “저희가”< “저희도” 용서는 왜? 그리고 누가 먼저?

    Date2025.04.03 Category성경 다시 보기 Views86
    Read More
  3. 육화2. 나 전체로서, 나의 삶 전체를 살기

    Date2025.04.03 Category희년 Views54
    Read More
  4. 그리스도교 원공동체 '교부시대'의 시작

    Date2025.03.13 Category교부들의 삶과 신앙 Views76 file
    Read More
  5. 생명, 환경-창조교리 그리고 생태신학

    Date2025.03.13 Category사회교리 Views51 file
    Read More
  6. 신앙생활과 교회법

    Date2025.03.06 Category교회법 Views81 file
    Read More
  7. 요한의 체포와 예수님의 처신 (마태 4,12-17)

    Date2025.02.27 Category성경 다시 보기 Views313
    Read More
  8. 육화1. 앎

    Date2025.02.27 Category희년 Views315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2 Next
/ 42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