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
2024.06.13 09:24

부스러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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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예수 성심 시녀회/ 진동 요셉의 집

진동 요셉의 집 수녀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꼭 카페에 간다. 수녀님들이 농사짓는다면서 ‘그렇게 한가한가? 비싼 커피 집에서 마시지 카페에는 왜가나?’라고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커피 마시고 친구 만나러 카페에 간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주말 저녁에 카페를 방문한다. 중국집에도 짜장면 먹으러 가지 않는다. 그럼 뭐 하러 카페나 중국집을 드나들까?
커피 찌꺼기와 계란껍데기를 수거하기 위해서다.


커피 찌꺼기와 계란껍데기는 아주 좋은 거름이 되기에 예전에는 우리 수녀원 자체에서 나오는 것과 다른 분원 수녀님들이 모아주시는 걸로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커피 찌꺼기를 이용해서 발효시킨 거름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진동 주위 카페 몇 군데에서 버려지는 커피 찌꺼기를 일주일에 한 번 수거해 오기로 했다. 고맙게도 진동 네거리 근처 카페에서 주말에 커피 찌꺼기를 수거하도록 해 주셔서, 가지고 오면 말려서 발효과정을 거쳐 밭에 뿌릴 거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수녀원 아래에 있는 중국집에서도 계란껍데기를 모아주셔서 일주일에 두세 번 가서 수거해온다.


작년 가을에는 대구 다녀오는 길에 ‘내서 IC’를 지나면서 길가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10리터 쓰레기봉투에 담아 놓은 것을 보고는 우리 수녀님 두 분이서 차를 길가에 세운 후, 서른 봉지 이상 되는 걸 끙끙거리며 다 실어 온 적이 있다. 은행으로 액비를 만들어 밭에 뿌리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상식적(?)인 일들을 많이 하며 살고 있다. 효율적이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어리석게도 보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어떤 거창한 결과를 바라는 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산성화된 땅들이 다시 살아나고 매년 점점 악화되어 가는 기후위기가 조금이라도 늦추어지면 좋으련만 그런 희망적인 일들은 일어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멈추고 싶다고? 아니다. 지금까지는 농약을 쓰지 않아서 하늘에서는 새들이 온갖 열매들을 먼저 맛보고 밭에서는 지렁이가 많으니 두더지가 온 밭을 다 후비고 다녀 작물들이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한다. 거기다 온갖 벌레들과의 전쟁은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하지만 우리 삶의 방식은 자연 안으로 보이지 않게 조금씩 스며들어가고 있고, 자연보다 앞서 우리 자신을 먼저 치유해 주고 있다. 더 많이, 더 빨리 수확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멀어지게 해 주고, 부족하고 아쉽기에 더 많이 나를 내어놓고 낮아지게 해 준다. 또 어렵고 느리지만 주위 자연과 형제자매와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면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연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커피 찌꺼기, 계란껍데기 그리고 은행 알맹이에 우리의 수고로움을 한 숟갈 얹어주었더니 훌륭한 거름으로 변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의 부스러기 삶에 자연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손길이 늘 함께하시니 우리도 당신 나라의 좋은 거름으로 변화시켜 주실 거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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