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몸이 모든 관계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곧 혼자 걸으며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몸의 한 부분이 장애가 있으면 비장애인과 쉽사리 어울리지 않듯이 나도 어떤 면에서는 그와 유사한 특징이 있었다. 식성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이다. 식당에 가면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다. 원래부터 빵과 커피, 아이스크림과 버터를 안 먹었다. 스페인의 모든 요리에는 거의 버터가 들어갔다. 굽고 부치고 볶는 데는 버터가 기본이다. 빵도 반죽할 때 버터가 상당량이 들어간다고 한다. 식성은 내 의지로 잘 바뀌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서 먹을 것이 이것밖에 없고 이것이라도 안 먹으면 죽는다고 하면 그때는 모르겠다. 그러나 일말의 여지가 있는 동안에는 먹을 수 있는 것만 먹고 싶었다. 약은 예외다. 그래서 몸에 맞는 음식만 먹다 보니 끼니때마다 먹을 때도 있고 굶을 때도 있었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삼시세끼에서 벗어나 먹었던 양을 살펴보면 하루 한 끼 정도밖에 안 되었다. 미용과 건강, 어떤 결의로 한 끼만 먹겠다는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몸이 받아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밀려서 이리되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고 억지로 논리를 만들어 보지만 마땅한 말이 없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설명하기가 어렵나 보다. 그렇다면 설명이 필요한 것들이 사실상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삼키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봐야겠다.
여럿이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에 둘러앉아 메뉴판을 보는데 그중 한 명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있으면 매우 밉상일 것이다. 내가 거기에 속하였다. 숙소에 도착해 여러 나라 순례자들과 같이 어울려 레스토랑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닭, 생선, 돼지, 쇠고기로 구분해 이 중에서 구운 거냐 찐 거냐 부친 거냐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매우 난감했다. 그래서 술안주용으로 많이 주문하는 감바스 알 하이오를 시켰다. 새우에 마늘을 듬뿍 넣어 오븐에 구운 요리이다. 그런데 여기도 버터가 자글거렸다. 이후부터 여럿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는 피하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가 되었다. 식성 때문에 고립이 된 것이다. 일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친구와 일가친척, 성당 교우들을 만났을 때도 식사를 중심으로 이뤄지거나 이룬 다음 식사 자리로 연결된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배려와 함께 누군가가 견뎌주었기에 별 탈 없이 지나온 것 같다.
바뀐다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태도이고 태도는 몸으로 표현이 된다. 무엇을 어떻게 느끼며 어떤 것을 수용하고 거부하며 무엇을 할 수 있고 없고의 한계도 결국 몸에 달렸다. 식성을 통해 세상과 어울리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누구보다도 선제적으로 더 많은 양보와 견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도 쉽사리 바꿀 수 없는 몸 때문이다. 외롭고 쓸쓸한 순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성향이 아닌 몸이다. 마음은 나를 떠나 온 우주를 비행하면서 본질을 잃어버리고 나와 충돌을 일으키지만, 몸은 어떠한 상황에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몸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