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교구 성경교육봉사자를 중심으로 한 26명이 일본의 천주교 역사지인 나가사키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일본 선교의 씨앗은 1549년 8월 15일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 동료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그리스도교 금지를 폐지하기까지 324년간을 일본 ‘기리시탄(가톨릭 신자)사’라 한다. 특히 1614년에도 막부가 금교령을 선포한 이후 259년간은 혹독한 박해 시대였다. 순례단은 박해 시대에 갖은 고문과 고통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낸 기리시탄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운젠, 시마바라 성당,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배경지인 소토메, 우라카미, 니시사카 26성인 순교지, 일본 신자 재발견 오우라 천주당, 나가사키 평화공원, 나가이 다카시의 여기당, 하비에르 성인의 발자취의 히라도, 이키츠키 섬 등을 순례하였다. 무엇보다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에 일본 첫 26성인의 순교지 바로 옆에 있는 순교자 기념성당인 성 필리피 성당에서 온 마음으로 미사를 드렸던 것이 가슴 속에 깊이 남는다. 순례 여정마다 깊은 감동과 울림은 가슴 아픈 눈물과 함께 감동과 큰 은총의 시간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시마바라 반도 운젠의 순교자들, 운젠은 에도 막부의 천주교 금교령으로 많은 신자들이 배교를 강요받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이 끌어온 장소이다. 배교이냐? 죽음이냐? 끝까지 배교를 거부한 사람은 발가벗겨져 묶인 채 끓은 유황물 속에 빠뜨려 죽이거나 심한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뜨거운 온천물에 지옥을 경험하게 되기에 운젠 지옥이라 불린다. 특히 이곳에서 순교한 우치보리 복자와 그의 아들을 시마바라의 순교자 기념 성당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성당 입구에는 그의 아들이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남기고 잘린 채 두 손을 하늘 향해 뻗고 있는 모습은 당시 받은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죽는 순간까지 비록 몸은 죽어도 영혼을 해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굳게 믿고 주님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니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 그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순교의 무대, 니시사카 26성인 순교지, 일본 최초의 박해 사건은 교토, 오사카 등에서 끌어와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시 니시사카 언덕에서 26성인이 순교한 사건으로, 이곳은 일본에서 전대사가 가능한 장소이다. 26성인 중에는 아버지와 아들도 있었고 3명의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에 양쪽 귀는 잘리고, 마차에 3명씩 태워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한 달을 걸어 이곳에 와서 순교하였다. 남자 걸음으로 세 발 간격으로 이름을 새긴 십자가를 세우고는 순교자들의 다리를 묶었다. 12살 소년의 “내 십자가는 어디 있나요? 묶어 주시오.”라는 말에 정녕 나는 내 일상 안에서의 십자가를 이 아이처럼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묵상하게 하였다. 이 소년은 “천국에서 만나자. 주님을 찬미하라”는 말을 남겼다.
긴 세월 동안 기리시탄들이 감시와 밀고, 후미에[성화상 밟기] 속에서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켰다. 한 명의 사제도 없는 상황에서 모진 박해를 견디며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7대에 걸쳐 신앙을 지켜왔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이들과 함께 하시며 빛으로 인도해 주심을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된다. 악의 세력은 십자가 위에서도 유혹할 수 있으니 늘 겸손되이 살아야겠다. 이번 순례길에 은총으로 친히 동행하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도움주시고 함께 한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