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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경남대

송상옥의 『흑색 그리스도』는 종교색 짙은 제목과는 달리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묘사한 작품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고향의 처녀를 겁탈하고, 버렸다가, 어떤 계기로 돌아가는 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렇게 진부하고 소박한 내용으로 집약되지 않는, 결코 만만하게 처리될 수 없는 많은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바다가 있는 고향에서 주인공은 소년기를 보낸다. 그는 하늘로 솟아오르고 싶었고, 날고 싶었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기 전, 그는 우연히 만난 여학생 ‘영희’를 겁탈하고 아이를 잉태시킨다. 그러고는 방학이 되어도 고향을 찾지 않고 외면했다.


그는 이런저런 무의미한 여성 편력을 이어가고, 별다른 마음 없이 향순이와 애인으로 지내기도 한다. 이렇게 현실 속에서 방황하면서 그는 영희나, 향순이나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여인들이 죽어 버리기를 바라고, 절망에 빠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고는 한다. 그래서 그는 기적을 꿈꾼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시니라……”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 성경 구절 같은 기적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은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이고, 결국 그는 절망에 빠져 기적을 부인한다.


“기적은 없어. 기적을 행하는 그리스도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어. 공중에 떠 있는 새까만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야.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새까만 그리스도가…”


어느 날, 그렇게 간절하게 죽어 버리기를 바랐던 여인들 중 건넌방 아가씨 경자가 음독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의 마음이 바뀐다. 그는 거짓 사랑에 지친 향순이나 자신이 버린 영희처럼 고통에 찬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드디어 영희를 찾아 고향으로 내려간다.


『흑색 그리스도』의 그가 꿈꾸던 것처럼 죽은 자가 일어나듯 한 기적은 없을 수 있다. 어느 날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고, 열심히 준비하지도 않은 시험에 덜컥 합격하거나,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그런 기적 말이다. 하지만 『흑색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정말 말도 안 되는 한순간에 의해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는 있다. 오랜 미움이 화해의 눈물로 바뀌고, 방황 끝에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나타나는 것,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또한 기적이 아닐까?


‘공중에 떠 있는 새까만 그리스도’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우리 일상에서 이루어내고 있는 기적은 의외로 많다. 우리 마음속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성탄의 촛불 하나가 겨울을 따뜻하게 변신시키듯이, 사소한 일상 하나에서도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기적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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