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2.03.31 11:29

풍랑 속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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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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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세상의 어두운 면은 보지 말고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세요! 세상에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신부님이 걱정돼서 그래요. 신부님 마음속에 분노와 어둠이 아니라 평화와 빛이 쌓이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이 시대 정치, 검찰, 사법, 언론의 잘못과 그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 그리고 그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어떤 분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다. 불의를 고발하고 그에 맞서는 것이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분노와 어둠을 쌓는 일이란다. 나를 위해 해주시는 말씀이라는데 그분이 제발 나를 위하지 말고 어둠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나에게 어떤 경우에도 동요되지 않는 ‘부동심’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난리가 나고 사방에 비명이 가득해도 동요되지 않고 평온할 수 있는 것이 마치 도통한 사람의 달관한 모습인 양 생각하는 거다. 이러한 생각은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도 동요되지 않는 부동심은 사회생활에서 대단히 유용해 보이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처럼 속사정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가 전쟁 같은 세상살이에서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가도 그런 삶이 정말 올바른 것일까? 아니,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그분은 마음의 평온에 이르기 위해 세상의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나에게 충고한다. 도대체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 그분이 SNS에 올리신 사진과 글들을 찾아보았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 분위기 있는 카페,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시, 애완동물 등등, 그분 말씀대로 거기에는 세상의 좋은 면과 좋은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었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암울한 일들에 대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문득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신 어느 스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스님도 이렇게 말한다. “자기 삶의 내용이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 이야기나 연예인 이야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게 됩니다. …내 삶의 내용이 알차면 남 일에 거품 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삶의 내용을 풍요롭고 알차게 하는 방법으로 독서, 봉사활동, 어학 공부, 운동, 미술, 악기, 뮤지컬 관람, 여행, 피정 등을 권했다. 과연 TV에 비춰진 그 스님의 삶과 살림살이는 그늘과 구김살 하나 없는 ‘웰빙’과 풍요 그 자체였다.


이렇듯 세상의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좋도록 사는 것, 얼핏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정말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꼭 좋은 게 옳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냥 편하게 생각하라고 말들을 하지만 편한 게 선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창밖 어둠 속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리는데 창문 닫고 커튼 치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것이 어찌 평온함일 수 있나! 세상에 온갖 불의와 부정과 중상과 모략이 난무하는데 나 혼자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있다 하여 그것이 어찌 고요함일 수 있을까! 정치에 무관심하고 남의 일에 상관 안 하면서 자기 생활에만 열중하는 것이 어찌 풍요로운 삶일 수 있나! 그런 것들이 어찌 어둠에서 벗어나 빛 속에 머무는 삶일 수 있는가!


예수님은 그런 식의 평온함을 당신이 초대하시는 평화와 구분하신다(루카 19,42; 요한 14,27 참조). 예수님의 평화는 그늘 하나 없고 구김살 하나 없이 밝고 따뜻하고 말쑥한 그런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수난과 죽음 한가운데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그런 평화다(요한 20,19 참조). 좋은 면만 바라보고 좋은 생각만 하는 데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더럽고 그늘진 곳에 비치는 한줄기 햇살 같은 평화요 고뇌와 번민 속에서도 기도하고 고통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그런 평화다. 아무도 없는 산 위에서 누리는 평온함이 아니라 산 아래 처절한 십자가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구현되는 그런 평화인 거다(마르 9,2-10 참조).


이와 같은 예수님의 평화는 ‘풍랑 속의 예수님’(마르 4,35-41 참조) 모습 안에서 그 면면이 잘 드러난다. 호수 한가운데서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인데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평온히 주무시고 계신다. 제자들은 말한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지라 명하시니 바람은 멎고 호수는 고요해진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평화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평화란 풍랑이 무서워 호수로 들어가지 않고 육지에만 머무는 그런 평온함이 아니라 풍랑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고요함이라는 사실이다. ‘풍랑 속의 고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참평화의 모습이다. 세상의 어둠을 바라보지 않는 데서 오는 편안함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들어가 그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과 함께 빛을 바라보는 삶, 그 고된 삶 안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평화다.


결국 평화의 실체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이다. 하느님 없이 아무리 평온해도 그것은 평화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눈부셔도 그것이 빛일 리 없으며 차고 넘치게 풍요롭다 한들 그것이 충만함일 수 없다. 우리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 자체가 곧 평화요 빛이며 충만함이 아니겠는가(시편 23,1-6 참조)!


그렇다면 평화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문제를 멀리함에서 오는 평온함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한가운데에서도 이루어낼 수 있는 믿음의 열매요(마르 4,40 참조) 문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의로운 삶의 결과다(이사 32,15-20 참조). 정녕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2-3)


순교자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이 불쌍해 보이나? 천만에, 오히려 부럽다! 평화는 그런 거다. 제발 나를 위한답시고 내게서 평화를 앗아가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출처 : 월간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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