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2.09.01 11:52

무지와 두려움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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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사람을 떠올릴 때에 두려움이 앞서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볼 수도 만날 수도 없고 혹시 우연히 스치기라도 했다가는 꼼짝없이 간첩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예전에야 북한사람이란 늘 어둠 속의 귀신처럼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처럼 탈북민과 함께 살아가고 북한관광을 이야기하며 북한제품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북한사람은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을 가진 보통 사람이다.


눈에 보이면 무섭지 않다.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소복 차림의 처녀귀신을 백주 대낮에 저잣거리에서 마주한다면 무서울까? 무서움보다는 궁금함과 함께 불쌍한 마음이 더 들 것 같다. ‘대체 왜 저러고 있을까?’ ‘무슨 일을 당한 걸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예전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을 때 난생처음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은 북한의 젊은이들을 보고는 ‘다 자식 같고 손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수십 년간 쌓여 온 두려움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눈에 훤히 보일 때보다는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무섭다. 희미한 가로등 너머 어두운 골목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어둠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더욱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 지난 70여 년간의 북한이 우리에겐 그런 곳이었다.


독재 권력의 공포정치는 이런 식의 두려움을 주요 통치수단으로 활용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두려움! 그래서 공포정치는 우민정치와 통한다. 국민들의 눈과 귀, 심지어는 생각까지 통제하여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없게 만든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삭인다. “알면 다쳐!” 공포정치를 자행하는 이들의 이미지가 곧잘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기관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저 검은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듯이 캄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어떤 일을 벌이고 저지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권력자들의 존재란 늘 섬뜩한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우리가 진짜로 두려웠던 것은 북한사람들이 아니라 반공과 적개심을 강요하던 이 나라의 권력자들이었다. 북한의 인민무력부가 아니라 남한의 안기부가 더 무서웠던 거다.
물론 ‘초전박살’ ‘멸공’이란 말이 나라 구석구석에 도배되었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공포를 조장하는 정치행태는 사회 곳곳에 만연하다. 이 시대, 언론인과 법조인이 야합하여 진실과 정의를 가리고 불안과 두려움을 키워 국민들을 구속하고 지배하려 드는 모습을 보라! 우리가 더 좋은 나라,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두려움과 속박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모로 더 잘 보고 더 잘 알아야 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는 두려움을 주지만 우리가 그 바닷길을 알게 되면 두려움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널 수 있다. 보이면 무섭지 않다. 알면 갑갑하지 않다. 그래서 두려움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추고 밝히고 보고 배우고 알아야 한다. “알아야 면장 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면장’이란 행정직을 뜻하는 ‘면장面長’이 아니라 ‘면면장免面牆’의 줄임말이다. 즉 “알아야 면면장免面牆 한다.”가 본말인데 ‘무릇 사람은 배우고 알아야만 담벼락을 마주 보는 듯한 답답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사실 배우고 깨우치지 않으면 담벼락 마주 보는 답답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담장 너머의 세상을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마냥 담장 안에만 갇혀 살면서 담장 너머를 향해 가는 이들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공포정치와 우민정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속 좁고 수구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이유다. ‘보수’를 참칭하는 ‘수구’세력은 그런 의미에서 많이 무식하고 비겁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배우고 아는 일을 게을리할 수 있으랴!


그런데 잘 보고 깨우쳐 알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는 잘 비추고 밝히어 드러내 주어야만 한다. 이 시대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바르게 식별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고, 묻히고 감추어진 진실에 대해서는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권력자들의 부정과 비위에 대해서 폭로하고 고발하는 행위들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모두 어둠에 가려진 것들을 비추고 밝히어 사람들이 보고 알아 두려움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노력들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6-17)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세상을 비추는 내 안의 빛’이란 다름 아닌 ‘빛이신 주님’이라는 사실이다. 간혹 그리스도인이면서 심지어는 사제이면서 어둠의 세력을 지지하는 황당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들이 그러는 이유가 뭐겠는가!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 11,35)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


결국 세상을 비추고 밝힘은 ‘행위’가 아닌 ‘존재’의 문제다. 내 존재가 어둠이 아닌 빛으로, 거짓이 아닌 참됨으로,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즉 우리의 주님으로 온전히 채워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또한 주님의 은총 없이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 옛날 예리코의 소경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20,33.34)

 

출처 : 월간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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