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2.11.03 13:25

거저 주는 사랑, 갚아 주는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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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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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지나가는데 피하지도 않네!” “사람이 지나가는데 차로 들이미네!”
“어디서 끼어들려고!” “야, 그걸 안 비켜주네!”


입장과 견해가 상반된 이 말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들이다. 사람과 자동차가 뒤섞인 좁은 도로에서 운전할 때와 걸어갈 때, 수많은 차량이 뒤섞인 혼잡한 도로에서 끼어들기를 할 때와 안 할 때의 반응은 이처럼 서로 다르다. 같은 장소, 같은 상황, 같은 행위라도 그 사람이 처한 위치와 자리에 따라 생각과 감정은 그때그때 서로 달라진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보통 타인이 아닌 자신의 입장에서 먼저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똑같은 사안이라도 자신에게는 너그러우면서 남에게는 엄격한 ‘자기중심적 이중 잣대’를 만들어 낸다. 탐탁지 않은 어떤 행위도 내가 하면 그럴만한 상황 때문인 거고 남이 하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야말로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세상, 법과 원칙이 고무줄처럼 적용되는 ‘내로남불’의 세상이라고 할 만한 요즘의 현실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정도껏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의 삶을 짓밟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여서는 안 되는 거다.


인간이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이는 이기심을 뛰어넘는 이타적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기나긴 역사 안에서 예수님의 복음말씀을 비롯해 수많은 도덕적 가르침들이 한결같이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이타적 삶을 촉구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사람들 개개인의 끈질긴 이기심도 문제지만 그것이 투사되어 만들어 낸 권력이라는 괴물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탐욕스럽고 거세다.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뛰어넘어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타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역시 우리는 그 해답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해 낼 수 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첫째는 ‘거저 주는 사랑’이요 둘째는 ‘갚아 주는 정의’다. 이는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하나로 합쳐 주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너의 이익은 곧 나의 이익이 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점점 그를 닮아 가고 결국에는 그와 같아진다.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된다. 그의 손실이 내 손실이 되고 그의 이익이 내 이익이 된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어줄 수 있다. 이렇게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고 거저 줄 수 있는 사랑 안에서 이기심은 이타심과 하나가 된다. 이는 본래 예수님이 알려 주신 하느님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아지시고 우리를 배불리시려고 양식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신다. 하느님의 이 사랑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닮은 ‘이웃 사랑’을 계명으로 주신다(루카 10,25-37/ 요한 13,34;15,12-17 참조).


그런데 그 사랑 또한 참 쉽지가 않다. 우리가 하는 사랑이란 게 기껏해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가!(루카 6,32-34 참조)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억지로라도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셨을까! 쉽지 않기 때문인 거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갚아 주는 정의’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베드로의 이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예수님에 의하면 ‘거저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은 또한 ‘갚아 주시는 정의의 하느님’이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나눔으로써 하늘 나라의 보물을 차지하게 하시고(마태 19,21 참조) 자비를 베풂으로써 더 큰 자비를 입게 하시고(마태 5,7;18,33/ 루카 6,35 참조)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요한 12,24-25 참조). 또한 ‘거지 라자로’처럼 이승에서 고초를 겪게 되면 죽어서라도 위로를 받게 하시고 ‘비정한 부자’처럼 이승에서 호사를 누리면 죽어서는 고초를 겪게 하신다(루카 16,25 참조). 이렇게 갚아 주시고 바로잡아 주시는 정의의 하느님은 ‘너를 이롭게 하는 것’을 곧 ‘나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은 많이 부족하여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본받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갚아 주시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과 순명 안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공정과 상식이 무너지고 ‘내로남불’이 만연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노력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사실 역사 안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이미 있어 왔다. 바로 ‘사회복지’와 ‘사회정의’란 것이다. 우리가 ‘사회복지’라고 말하는 것들은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구현해 내려는 노력들이고 ‘사회정의’라고 말하는 것들은 갚아 주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해 내려는 노력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 교회는 달리 말하면 세상 안에서 ‘사회복지’와 ‘사회정의’를 선포하는 교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 안에는 ‘사회복지’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면서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불편해하거나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정의 없는 자선이라니… 가진 자들의 값싼 동정심 같은 것 아닌가!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낸 눈 속의 ‘들보’는 없는지 늘 반성해 볼 일이다(마태 7,3-5 참조). 

 

출처 : 월간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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