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1.09.28 11:58

적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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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어떻게 깎아드릴까요?”


미용사의 이 말에 난 항상 약간의 고민 끝에 이렇게 말한다.


“적당히 깎아주세요!”


신기하게도 매번 미용사들은 정말 적당히 깎아준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말이다.


나는 ‘적당히’라는 말이 좋다. 이 말은 그야말로 ‘넘침도 부족함도 없이 알맞게’라는 뜻이 아닌가! 이 말 뜻을 알아준 미용사들이 고맙다. 사실 ‘적당히’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적당’이라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큼을 가리키는지 모호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대충’이라는 말과 함께 쓰여 ‘열심히 하지 않고 성의가 없다’는 뜻을 지니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서 ‘적당하다’는 것만큼 좋은 게 있을까? 정도에 알맞은 적당함이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창세 1,1-31 참조) 과연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적당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쪽에선 넘쳐서 난리고 다른 한쪽에선 부족해서 난리인 이 세상에서 그 바람은 더욱 간절해진다. 어찌하면 좋을까?


그 답을 찾음에 있어 우리는 먼저 ‘적당하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적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적당함을 판가름할 기준 즉 적당함의 이유가 되는 준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어떤 ‘적정선’이 전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선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바로 적당함이 되는 거다. 그렇다면 적당함의 기준이 되는 그 ‘적정선’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한계’라고 일컫는 것들이 아닐까?


우리의 삶,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넘지 말아야 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 것이다. 사실 넘어서야 하고 넘어서도 되는 것은 이미 한계가 아니다. 그런 것은 ‘장애’ 혹은 ‘장벽’이라고 일컫는 것들이다. 우리 삶에 자리하는 장애와 장벽들은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나 몰이해와 차별에서 오는 사회적 장벽들은 도전과 저항 그리고 개척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극복하고 넘어서야 하는 거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만들어진 한계는 결코 넘어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 38,11)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적당함’이란 주님의 이 말씀에 순명하여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도를 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를 ‘모세의 돌판’과 우리의 ‘양심’ 안에 ‘계명’으로 새겨 놓으셨다(탈출 34,28; 시편 16,7 참조).


결국 한쪽에선 넘쳐서 난리고 다른 한쪽에선 부족해서 난리인 세상의 이 적당하지 못한 모습은 넘지 말아야 할 선,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정해진 그 한계를 넘어서는 불순명으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들이다. 우리의 신앙은 도를 넘어서는 이 모습을 ‘죄’라고 표현한다(창세 3,1-24 참조).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죄스러운 모습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는 모습들이 어디 한둘인가!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을 만들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며 탐내지 말아야 할 것을 탐내고 가져서는 안 되는 것까지 가져버리는 모습들이 허다하다. 도를 넘는 편리함과 부유함, 도를 넘는 권한과 영광, 도를 넘는 건강함 등이 다 그런 식이다. 마땅히 세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두 시간으로 단축시키려 그 좋은 산을 허물고, 이미 있는 것도 넘치는데 또 뭔가를 만들어내느라 핵물질을 태우고, 나눠 먹으면 충분히 배부를 것을 나누지 않고도 배불린답시고 유전자 조작을 해댄다. 정직하게 일해서 얻는 적당한 풍요를 넘어 보통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부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몫을 빼앗고, 봉사하는 권한을 넘어 군림하는 권력을 갖기 위해 약자들의 기본권을 박탈해버리고, 성실하게 땀 흘려 일구는 보람을 넘어 그저 성적과 결과만으로 이루어진 영광을 위해 승부를 조작하거나 편법을 동원하고, 생로병사를 뛰어넘는 불로장생을 꿈꾸며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실험을 해댄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 적당치 않은 모습들이 만연하다.


공생활을 앞두신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 사십 일 동안 단식하시며 유혹을 받으신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얻는 부유함,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얻게 되는 명성, 악하고 부정한 방식으로 얻게 되는 힘에 대한 유혹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이 유혹의 면면을 보면 모두가 다 선을 넘으라는 요구들이다. 세상에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은 돈 없고, 이름 없고, 능력 없는 이들이나 하는 짓이고, 남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이루어진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유혹한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갔던 유혹이다. 하지만 그 유혹을 예수님은 물리치신다. 예수님은 사람이 도를 넘지 않고 적당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함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사랑은 도를 넘어서지 않고 늘 적당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악마의 이 유혹을 물리치신다(마태 4,1-11 참조). 이는 뱃속에 아기를 가진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임신한 여인은 어머니로서 늘 적당하게 처신한다. 행동거지에 있어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으려 노력한다.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다. 이처럼 선을 넘지 않는 우리 삶의 적당함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결국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적당함이란 삶의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의 문제다. 내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이 모든 것들을 지으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내 삶이 적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하느님 보시기에 적당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 안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2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결국은 또 사랑인 거다.

 

출처 : 월간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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