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바둑 기사들이 혼자 바둑 두는 것을 종종 본다. 바둑을 모르는 분들은 왜 혼자 두는지 의아해하지만, 그들은 누군가와 둔 바둑을 ‘복기’하는 거다. 보통 바둑 한 판에 둔 돌이 약 400개라니, 그들은 돌의 자리를 다 기억한다. 그것도 상대와 둔 순서까지도. 이렇게 그들은 복기를 그리 어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분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물었다. “대국 때 둔 한 수 한 수가 다 의미 있는 점이기에 가능합니다. 단지 그 첫 자리들만 안다면 나머진 절로 나옵니다.” 프로들은 이 복기를 밑거름으로 삼아, 차후 시합에서 자신의 것으로 이용한다나.
중년의 나이에 무일푼으로 성공 신화를 일군 어느 기업체 회장이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중요 순서대로 일을 정해, ‘철저한 계획과 지속적인 실천’을 한 것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그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이는 쉬운 것 같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정하는 게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물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성취하려는 치밀한 사전 계획입니다. 저는 이를 지난 수년 동안 현장에서, ‘시작이 반’임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왜 바둑 기사가 복기할까? 그건 바로 자신의 실력을 익혀 다음 판을 잘 짜기 위한 사전 준비일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실 때에 정말 치밀했다. 먼저 남자를 모르는 수줍은 마리아의 동의를 구하고자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으로 보내 설득했다. 그녀와 약혼한 요셉을 면담으로 다독이기는 거북해, 꿈에서 양해를 구했다. 또 길잡이 요한을 앞서 보내고자 사제 즈카르야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마리아를 유다 산골 엘리사벳에게 보내, 뱃속 두 아이의 만남을 사전에 성사해 메시아 탄생 예고를 리허설하여 최종 확인까지 했다. 그렇게 그분의 ‘예수’라는 이름으로 지상 순례의 여정을 계획하실 때 참으로 치밀했다.
이처럼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그것도 시작이 참 중요하단다. 물론 그 시작이 잘 되면 끝마저 좋아진다나. 그렇다. 시작과 그 끝은 의당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그래서 다들 복기하는 거다. 이렇게 삶이 있기에 죽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신앙은 이 끝을 마련하는 준비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무리를 잘 준비시키시고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상 순례를 시작하셨다. 그분의 외침은 회개였고 용서였지만, 여전히 용서 대신 응징, 회개 대신 ‘남 탓’인 모습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예수님은 새로운 시작인 ‘최후의 심판’ 때, ‘작은 이 사랑’을 근거로 우리를 오른쪽 왼쪽으로 편 가르시겠단다. 따라서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다. 새 출발선이 드러나는 복기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