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4.01.25 10:48

도마 위에 쓴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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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철 스테파노 시인

비가 내린다.
유리창을 톡톡 두들겨 주는 작은 빗방울의 부딪침,
아프고 힘든 감정의 보풀들을 감싸 안으려는 듯 낮게 떠 있는 구름,
그런 ‘허밍스러운’ 날이면 부엌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는 행복하다.


내가 책을 읽거나 책상머리에 앉아 학교 숙제를 하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셔서 간식거리를 만드시곤 하셨는데 나는 음식 만드는 소리가 좋아서 때로는 책을 펼쳐 놓고 읽는 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는 부엌에 가셔서 맛있는 간식거리를 뚝딱 만들어 오셨다.


김치만두, 김치만두는 말 그대로 김치로 만든 만두였는데 내 어릴 적에는 형편들이 다 그러하여 가볍게 씻은 김치와 당면을 버무린 속을 가지고 만든 만두였다. 지금도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김치만두보다 더 맛있는 만두를 먹어 본 적이 없다. 부추전, 김치전, 때로는 잘 말려 놓은 떡가래도 구워서 주시기도 하였는데 조청과 함께 먹는 날이면 입이 찢어져 생물 도감에서나 나오는 바다 깊은 물고기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가 비운 자리에는 아내가 대신하였는데 나의 아내는 작곡가이자 연주가이다.


기분이 울적한 날이면 박자 없는 목수의 힘찬 망치질 소리를 들려주지만 그래도 “thank-you~” (아내가 기분이 좋을 때이면 나에게 화답해 주는 최고의 답변)인 날에는 4분의 4 박자인지 4분의 3 박자인지 모르지만 칼끝의 연주를 흥겹게 펼친다. 도마 위에는 멋진 악보가 그려진다. 그러다가 멋진 악상과 흥이 오른 날이면 어느 유명 난타 공연보다 더 멋진 연주를 하기도 한다. 


나의 아내는 소설가다. 
부엌에서 들려주는 아내의 이야기는 먼 과거의 이야기도 오늘이 되고 먼 미래의 이야기도 오늘이 된다. 때로는 뜬금없이 울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면서 도마 위에 칼질의 흔적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미움의 시간들도, 용서할 수 없던 시간들도, 때로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감사했던 시간들도 모두 조목조목 도마 위에 새겨 가며 작은 냄비 속을 채워 간다.


그렇게 채운 음식 재료들이 사랑의 묘약이 되어 ‘뽀작뽀작’ 일어날 때쯤이면 아내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요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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