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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사001.jpg

 

교구 40주년 기념 특집으로 ‘마산주보’에 게재되었던 마산교구 전사(前史)를 수정하여 ‘가톨릭마산(교구보)’

2023년 1월 1일 자부터 재수록 합니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1
조선의 천주교는 신앙의 대상이 아닌 학문으로 먼저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서학(西學)을 통해 천주교 서적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학은 중국에서 활약하던 예수회 신부들이 만든 용어다. 그들은 중국 선교를 위해 서구사상과 과학을 소개했고 이 과정에서 과감하게 천주교 이론을 중국 고전에 접목시켰다. 


이러한 책들은 지식인들에게 인기 있었고 유행처럼 읽혀졌다. 그리고 중국을 오가던 사신을 통해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러한 서학 열풍에 주도적 역할을 한 책은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이 서적은 예수회 소속 중국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 리마두) 신부의 대표작이다.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중국인 학자와 서양인 학자가 서로 질문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중국인 학자는 전통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 도교를 논하고 서양인 학자는 중국 고전을 인용해 기독교 이론을 해설하고 있다.


천주실의에 대한 비판은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처음 나온다. 그는 유교적 입장에서 상당히 부정적 자세를 취한다. 학자들 사이에 유행되고 있는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서학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학을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기호(畿湖)지방 학자들이다. 이들은 1770년대 말부터 경기도 천진암(天眞庵) 인근에서 강학(講學)을 열며 학문연구를 하다 신앙을 깨닫게 된다. 강학이란 공동 주제를 정한 뒤 질문과 답변을 통해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 인물은 권철신, 권일신, 이가환, 이벽,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이었다.


강학파 한 사람인 이승훈은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북경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회 그라몽(Grammont, 梁棟材 량동재) 신부를 만나 1784년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다. 따라서 이 해를 기점으로 1984년 조선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후 조선 천주교는 숱한 박해를 받게 된다. 사대(四大) 박해로 불리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와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경신박해(1860) 등이다.


서울의 박해는 신자들을 지방으로 내몰았고 도시의 박해는 교우들을 산골짜기와 해안가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경기지역 천주교는 충청 전라 지역과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내려오게 된다. 결국 신자들의 이동은 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면서 이루어졌고 마지막 귀착지가 경상도 쪽이었다.


마산교구가 속한 경상도 서부지역으로 신자들이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1827년 정해박해 이후로 보고 있다. 전남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피난 교우들을 지리산과 백운산 덕유산 쪽으로 몰아넣었다. 살길을 찾다 보니 그들은 서부경남 깊숙이 들어왔고 남쪽 바닷가 해안지역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마산교구에 처음으로 교우촌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60년대 초반이다. 병인박해 이전에 마산교구 내에도 교우촌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록된 마산교구 교우촌은 다음과 같다. 거제도, 남해도, 통영, 고성황리(黃里), 사천의 배춘(培春), 진주소촌(文山), 칠원, 의령의 신반(新反)이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2
박해는 신자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 조치였다. 그러나 서울의 박해는 지방 교회 탄생의 원인이 된다. 피난 교우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관의 손길이 없는 곳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지역으로 신자들이 퍼져나갔다.


한편 박해로 인해 귀양 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아니었지만 유배지에서의 모범적 생활로 포교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또 몇몇 신자들은 귀양 가는 이들을 뒤따라가 숨어 지냈는데 이들의 노력으로 유배지에서도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피난 교우들의 삶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더러는 괜찮은 환경을 만나 주저앉기도 했지만 대부분 떠돌아다녀야 했다. 신분 노출이 두려웠던 것이다. 약간의 살림살이를 모으면 지방 사람들의 고발을 걱정해야 했고 관의 추적이 의심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했다.


그들이 떠날 때는 언제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유는 추운 겨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왕 떠돌아다닐 바에야 따뜻한 곳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올 때는 대부분 강을 따라 내려왔다. 강가에는 노는 땅이 있었고 물이 있었고 그래도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경남 지역은 피난 교우들의 마지막 귀착지가 되었다.


경상도를 관통하는 강은 낙동강이다. 강원도에서 발원하지만 안동을 거쳐 구미와 왜관을 돌아 대구의 금호강을 흡수한 뒤 경남 창녕 땅으로 흘러든다. 피난 교우들의 흐름도 이와 비슷하다. 경북의 오래된 공소들이 왜관지역에 몰려 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대구교구 두 번째 본당인 가실본당은 낙동강 교우촌들이 모여 만들어진 본당이다(1894년 설립).


마산교구에도 낙동강 유역엔 오래된 교우촌이 있었다. 그중에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함안과 진영의 유서 깊은 공소들이다. 기록엔 등장하지만 지금은 없어진 교우촌도 있다. 1890년대 이후 급격히 사라졌다. 이 시기는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대거 들어올 때다. 당연히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 시작되는데 이에 따른 변화가 큰 원인이었다. 


창녕의 모래 늪, 시렴, 마천, 구개, 환곡 교우촌. 의령의 덕천, 성당, 우곡 교우촌. 함안의 토뫼, 탑실, 산하치, 율량 교우촌. 밀양의 초동, 백산 교우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낙동강 근처의 수산, 명례, 생림, 양산의 교우촌들은 확고하게 남아 훗날 본당의 초석이 되었다. 


교우촌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리델(Ridel, 이복명) 신부가 남긴 기록이다. 1861년 조선에 입국한 그는 전국을 돌며 교우촌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원래 이 지도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신부의 초본(初本)을 바탕으로 리델 신부가 완성한 셈이다. 이 지도는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있었던 교우촌(공소)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대구본당 100年史 127면, 대구교구 발행 ‘빛’ 1984년 4월 호 71면 참조).


이 지도에 의하면 1860년경 전국엔 153개 교우촌이 있었고 마산교구에 속하는 교우촌은 8개였다. 거제, 남해, 통영, 고성, 사천, 문산, 칠원, 의령이다. 따라서 이 교우촌이 기록상 가장 오래된 마산교구 교우촌인 셈이다.


칠원과 의령은 낙동강 인근에 있던 교우촌이다. 원본에는 칠원, 의령이 아니라 교우촌 이름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우촌 이름만으론 어디 땅인지 알 수 없기에 교우촌이 속한 군(郡)을 표시했던 것이다. 지금은 칠원이 함안군에 속하지만 당시엔 칠원이 단독 군이었고 마산 일부도 칠원군에 속해 있었다. 칠원으로 표시된 교우촌은 죽청공소(現 칠북면 운서리). 의령은 덕천공소(現 유곡면 덕천리)로 추정한다.

 

조선대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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