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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교구장 주님 부활 대축일 담화문 "평화와 용서"

posted Apr 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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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주님 부활 대축일 담화문

 

1-배기현 주교 문장.jpg

 

 

 

사랑하올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기원하며 기쁨의 인사를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예수님 당시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우물(오아시스)을 두고 다툼이 많았던 근동의 유목 민족에게는 싸움 없는 평화’(샬롬 shalom)가 인사말이었습니다. 안개가 자욱했던 영국 해안에서는 좋은 아침’(good morning)이 자연스러운 인사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외세의 침략과 625를 전후하여 좌우익의 싸움이 치열했던 탓으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말이 인사말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평화’, ‘좋은 아침’, ‘안녕이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인사말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남북 간의 평화, 미세먼지, 그리고 북핵문제와 함께 쫙 갈라진 진영논리에 갇혀 안녕치 못한 나날들이 우리를 뒤흔들고 불편하게 합니다.

 

일제강점기, 정부 수립, 그리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우리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줄 알았던 이 이념 논쟁과 그에 따르는 조금은 낯선 역사이해(歷史理解)가 다시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표면상 고요한 것 같지만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이 문제로 인해 적잖은 어려움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평화로 향하는 길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유(自由 liberté)를 더 소중히 생각하고, 또 누구는 평등’(平等 égalité)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인간에게서 반드시 구현되어야 할 참된 가치이념인 이 말마디들은 프랑스혁명(1789)에 이르러 박애(博愛 fraternité)와 함께 크고 굵은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세기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누고 패권 다툼을 할 때, 자유가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전유물인 양, 평등이 마치 공산주의의 마지막 말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긍정하듯이, “자유 없는 평등은 거짓이고, 평등 없는 자유는 위선입니다.”(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라는 가치는 그 어느 것이든 한없이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고, 나아가 인간이 인간인 한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이를 실현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 결코 우리 힘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유, 평등, 평화는 결코 우리 인간의 투쟁만으로 쟁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용서,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자들의 용서와 화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추구함에 있어서 이 신앙의 진리를 깊이 인식하고 이 신앙의 토대 위에서 그 숭고한 가치들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유, 평등, 평화에 이르는 길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오직 십자가의 어리석음(1코린 1,18-25 참조)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정책도, 그 어떤 정부도, 그 어떤 국가도 그 길에 있어 하나의 방책을 제시할 수 있을 뿐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이 가치들을 완전하게 구현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모여 한없이 더’, ‘끝없이 더추구한다고 해도 결코 완전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만 그런 가치들을 더 완전하게 추구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더 큰 ’()을 불러올 소지가 큽니다. 왜냐하면 악의 발생이야말로 유한한 인간이 절대적인 것을 한없이 더추구하다가 걸려 넘어지게 되는 현상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베른하르트 벨테 악의 문제)

 

사랑하는 우리 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신부님들과 늘 고마운 수도자가족 여러분,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의 백성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한 나라의 국민인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있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여기서 넘어서 있다는 말은 윤리도덕적으로 혹은 가치이념적으로 상위에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넘어서 있다는 말의 뜻은 오히려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의 예수가 되어 이웃의 잘못을 뒤집어쓰면서도 내 이웃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의 인간으로 서 있다는 말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인사로 말미암아 떨고 있던 제자들의 두려운 마음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Spiritus)이 주는 참 평화가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의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참평화 때문에 자유도 평등도 그 추구하는 바의 목표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활의 평화가 주는 기쁨 때문에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는 마음들이 됩시다. 그리하면 우리나라 대한민국,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가 그리 멀지만은 않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한 가슴 안고 용기 있게 강복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알렐루야!”

 

 

2019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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