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성
2022.10.27 13:13

산을 넘고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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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재찬 안셀모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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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순례의 여정 중에 있습니다. 이 여정 가운데 꽃이 핀 아름다운 들판을 기쁘게 걷기도 하고, 좋은 길동무를 만나 도란도란 행복한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험준한 산을 오르기도 하고 골짜기에서 길을 잃기도 합니다. 벗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앙을 산을 넘고 넘어가는 여정에 비유해서 바라보면 어둠의 골짜기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 줍니다. 현대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삶의 여정은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깊은 상심과 외로움 속에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벗들과 책들을 접하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함으로써 회개하여 가톨릭 세례를 받고 엄률 시토회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회개는 한 번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제가 세례 받은 날까지 저의 삶의 이야기는 저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의 회심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심은 전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정점들과 계곡들의 연속이며, 마지막 계곡보다 각각의 새로운 계곡들은 더 높다는 점에서 대개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습니다.”(“The White Pebble,” in Thomas Merton: Selected Essays, 9) 실제로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여 갈등과 시련을 거쳐 새로운 하느님을 여러 차례 체험하며 성장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여정에서 첫 번째 산의 봉우리에 올랐을 때에 저 멀리 보이는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해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듯 행복과 평화로움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다음 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골짜기와 계곡을 거쳐야 합니다. 숲속에 있을 때에는 다른 산과 나무와 바위들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험산 산길을 오르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기심의 단단한 바위와 과거의 상처와 아픔들의 가시덤불들, 그리고 욕심과 욕망의 무서운 짐승들이 숲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묵묵히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고 다음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첫 번째 산에서 체험했던 하느님과는 다른 새로운 하느님, 더 가까이 느껴지는 하느님을 만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영적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온 험준했던 길을 되돌아보며 “내 힘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함께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업고 이곳으로 왔음을 깨닫고 한없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찬양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내면에 쌓아 올린 높은 아집의 산이 무너지고 과거의 상처들과 죄스러운 모습들이 하느님 품 안에서 녹아들어 자비로운 사랑으로 채워질 때 그 모든 골짜기와 어둠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산에 오르기 위해서 그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이 ‘산을 넘고 넘어가는 비유’를 통해 우리는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며 어둠의 골짜기 속에 있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가 넘었던 산들을 넘어 또 다른 산에 오르기 위해 골짜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겨우 첫 번째 산에 오른 내가 지금 신앙의 기쁨 가운데 있다고 해서 함부로 다른 이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여러 개의 산을 오르고 지금 새로운 산에 오르기 위해 어두운 밤을 거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심판은 하느님이 하신다. 나는 다만 사랑만 할 뿐이다”라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오히려 힘겨워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자세를 지니면 좋습니다. “내가 뭐라꼬!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까!” 


우리가 성당에 나와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자주 하느님 곁에 머무는 시간은 우리의 골짜기를 더 깊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의 나눔은 어둠의 계곡 속에서 길을 찾게 해 주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묵묵히 이 여정의 길을 걷다 보면 예수님은 산 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은 모든 곳에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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