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잇고 문화 렛잇비 신앙
2021.05.20 15:54

원수와 형제가 되다

조회 수 394
Extra Form
저자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형제인가 원수인가?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창세 4, 6-8 

 

 

210523 4면 책표지(홈피용).jpg

표지 출처: 성서와함께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 따라 인간을 만드시며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십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곧 등장하는 ‘두 남자’ 사이에 이미 다른 분위기가 등장합니다. 


카인과 아벨, 농부이고 목자라는 건 모든 사회를 형성하는 ‘다름’을 표현합니다. 하와는 카인과 그의 동생 ‘헤벨’을 낳았습니다. 헤벨은 흔히 아벨이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상 이름이 아닙니다. 카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와, ‘연약함’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헤벨로 불리는 그의 ‘형제’가 있습니다. 카인의 형제 헤벨,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헛됨이고 연약함인 동생 아벨은 형제를 대표하며 카인 앞에 존재하는 ‘타인’을 대표합니다. 


완전한 숫자가 14인데 반해, 이 이야기에서 카인의 이름이 열세 번 나온다는 것도 의미 있습니다. 카인이 자기 자신을 실현하려면 자기 앞에 형제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를 충만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형제, 달리 말해 타인입니다.


둘이 바친 제물에서도 다름이 드러납니다. 카인은 이 다름을 수용하지 않고 분노합니다. 카인이 아벨에게 건넨 말은 대화가 아닌 말 뱉음입니다. 대화하지 못함이 자기 형제를 살해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정답게 말을 건네지 못하는 일은 요셉의 형제들에게도 나타납니다(창세 37,4). 그럴 때 타인이 누구든, 피붙이 형제라도, 제거해야 할 원수가 됩니다.


폭력에 직면하여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던 해 둘째 달 열이렛날, 바로 그날에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 땅에 물이 점점 더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었다. 마른 땅 위에 살면서 코에 생명의 숨이 붙어 있는 것들은 모두 죽었다. -창세 6, 11. 7, 11. 19. 22.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지개(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창세 9, 11. 13.


서로를 원수로 여길 때 폭력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왜 폭력적인지 따지기 전에 서로를 어떤 관계로 보는지 살펴야 합니다. 서로를 원수로 여기면 주고받는 모든 것이 폭력이 됩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침묵도 혐오와 회피의 폭력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에서 마른 땅을 분리해 내어 창조하셨으며 홍수는 창조에 상반되는 일입니다. 창조에서 배열된 모든 것이 홍수에서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곧, 윗물과, 강과 바다의 아랫물이 합하여 마른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내리신 벌이라기보다, 인간의 폭력이 초래한 창조계의 혼란이고 파괴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고, 노아는 그런 하느님의 은혜로운 의지의 상징입니다. 비록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그들 안에는 하느님의 인호,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홍수 사건 이후 하느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 표징으로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무지개를 가리키기 위하여 전쟁 도구였던 동일한 ‘활’을 사용합니다. 도구의 성질이 아닌 사용하는 이의 태도가 도구의 쓰임을 결정합니다.  


연대감은 원수에게 사람의 얼굴을 부여한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 -탈출 23, 4.5.9.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43-45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규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규칙이 규제로써만 작용한다면 사고는 안 나더라도 ‘사람 사는’ 사회가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진 규칙은 서로를 향한 태도를 제시합니다. 감정적으로 적개심이 올라오는 원수 앞에서도, 오히려 우리 내면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느낌, 곧 원수 역시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실, 원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를 원수가 아닌, 나를 완성시켜 줄 형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꿈


동물들도 나름의 집을 짓기도 하지만 담을 세우는 것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동물계에선 존립 이유가 없는 것이 담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놓여 있는 담. -이명훈, 담을 넘어 집 밖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에페 2, 14. 17-19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과 이민족 사이를 갈라놓는 벽을 “적개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민족뿐 아니라, 같은 민족이자 유일한 의인이셨던 분마저도 적개심으로 단죄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정당함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일 뿐입니다. 폭력은 타인뿐 아니라 나도 파괴합니다. 생명을 품으신 그분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길을,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온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암브로지오 스프레아피코, 『원수와 형제가 되다』(생활성서사)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활용하였습니다.

 

210523 5면 백그라운드(홈피용).jpg


  1. 측은지심惻隱之心

    Date2021.07.01 Category한 말씀 Views518 file
    Read More
  2. 그리스도 페르소나를 입고자 하는 신학생들에게 1

    Date2021.06.24 Category렛잇고 문화 렛잇비 신앙 Views335 file
    Read More
  3. 하느님의 침묵은 기다림의 사랑이다

    Date2021.06.24 Category현대 영성 Views493 file
    Read More
  4. 바티칸 추기경과 제인 구달의 대화: 인간 생존이 걸린 생물 다양성

    Date2021.06.03 Category세계교회 Views406 file
    Read More
  5. 몸과 지체

    Date2021.06.03 Category한 말씀 Views212 file
    Read More
  6. 항상 기뻐하십시오: 어떻게?

    Date2021.05.27 Category현대 영성 Views500 file
    Read More
  7. 원수와 형제가 되다

    Date2021.05.20 Category렛잇고 문화 렛잇비 신앙 Views394 file
    Read More
  8. 신앙의 참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주님 안에 머물기

    Date2021.05.20 Category현대 영성 Views258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 34 Next
/ 34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