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
2022.09.29 11:47

할머니의 색동 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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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나자렛 예수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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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의 달을 맞아 미사 30분 전 성모 동산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 맨 뒷줄에 어느 날부터인가 낯선 할머니께서 꾸준히 참석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입을 오셨거나 친척 집 방문을 오신 신자분이겠거니 생각하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세례명을 여쭈었습니다. 잠시 망설이시던 할머니께서는 4개월 전 성당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글을 읽고 쓸 줄을 몰라 성당에 다니고 싶어도 교리반 등록이 어려웠던 사정과 성당 마당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기도를 배우고 싶어 참석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할머니의 사정을 전해 들으신 주임 신부님께서는 직접 할머니에게 교리 지도를 해 주셨고, 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주요 기도문을 녹음하여 할머니께서 익히실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셨습니다. 


그렇게 교리 공부를 하신 할머니는 45년 동안 신앙생활을 간절히 갈망했던 소망이 이루어져 ‘레지나’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후 바느질 솜씨가 좋은 할머니는 제의실이나 주일학교에 필요한 교구 재료를 손수 만들어 주시는 사랑의 나눔과 더불어 감사의 마음으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 후 레지나 할머니가 축복을 받고 싶다고 하시며 바구니를 내미셨습니다. 그 안에는 천으로 만든 장미 꽃송이가 색색으로 가지런히 담겨있었습니다.


“할머니 이 장미 꽃송이는 뭐예요?”라고 여쭈니 “내가 묵주기도를 드리고 싶어서 만든 꽃송이예요. 천으로 만든 것이지만 묵주기도를 하는 데 사용할 것이기에 신부님께 축복을 받고 싶어서요.”라고 환히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레지나 할머니는 76세 고령이신지라 기도문을 듣고 암기를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보니 교리 때 배우신 것을 생각하시며, 순교를 의미하는 홍색으로 십자가를 만드셔서 사도신경을! 녹색의 장미꽃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초원을 생각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하늘색 장미꽃은 성모송을! 흰색 장미꽃은 부활을 생각하시며 영광송과 묵주기도의 신비 지향을! 보라색 장미꽃은 회개와 보속의 의미로 구원송을! 묵상하시며 묵주기도를 바치시기 위해 천 안에 솜을 채워 넣으면서 지금까지 삶의 여정에 함께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마음을 기도에 담아 장미 꽃송이 60개를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을 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 꽃송이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기도를 하시려구요?” 걱정스럽게 여쭈시는 신부님께 “작은방을 기도 방으로 만들었어요. 방바닥에 5단 묵주 꾸러미의 모양으로 하나, 하나 꽃송이를 내려놓으며 묵주기도를 드리려구요.”


비록 묵주기도의 기도 말을 완벽하게 외우지 못하더라도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으로 기도문의 의미를 묵상하시려는 할머니의 말씀에 신부님께서는 정성스럽게 장미 꽃송이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매주 월요일 할머니 댁을 방문하여 글 읽기를 가르쳐 드리는 날에는 할머니와 함께 방바닥에 꽃송이를 내려놓으며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아직 글 읽기가 서툰 할머니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구원 사업을 이루신 복음의 내용을 지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으로 묵주기도의 각 단이 지향하는 신비를 곰곰이 묵상하며 예수님과의 친교 안에서 예수님의 일생과 그분께서 행하신 구원의 신비를 체험하는 은총 안에 머무르셨습니다.


유창한 언변이 아닌 단순하고 소박함으로 내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들음의 기도’ 안에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을 가지셨던 레지나 할머니의 겸손한 모습이 유난히 생각나는 10월입니다. 기도를 의무적으로 해야 할 숙제로 여기며, 각자의 사연이 있는 분심 속에 논리적으로 정리된 기도를 바치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의 마음을 되돌아보며 성모님께서 바치신 온전한 의탁의 기도를 떠올려 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전적인 순명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린 성모님과 같이 우리도 ‘주님의 뜻’이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에 그리스도의 향기로 피어나기를 기도드리며, 10월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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