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9
Extra Form
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경남대

성직자의 삶은 어떤 것일까.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의 연속일까, 아니면 평범한 인간의 고통이나 불안함도 있는 것일까. 김훈의 『저만치 혼자서』는 이 이야기를 한다. 


무대는 호스피스 수녀원인 ‘도라지 수녀원’이다. 정식 명칭은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지만 그냥 그렇게 별칭으로 부른다. 도라지꽃은 흰색이든 보라색이든 테두리에 희미한 검은색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빛깔에서 검은빛으로 흘러가듯이 말년의 수녀들은 이 수녀원에서 죽음으로 건너갈 준비를 한다.


손 안나 수녀는 여든 살이 되어 들어왔는데 이미 정신이 혼미한 상태이다. 그녀는 종신서원 이후에 기지촌 여자들의 삶을 보살피는 일을 하여 왔다. 김 루시아 수녀는 그녀의 룸메이트이다. 그녀 또한 젊어서부터 남해의 먼 섬에 격리된 나환자들을 돌보며 살아왔다. 깔끔한 성격이지만 어느덧 늙고 병들어 대소변을 지리고는 한다.

 
오래전 마가레트 수녀는 은둔의 삶을 버리고 세상 속에서 부상병들과 나환자들, 전쟁고아들을 돌보았었다. 그들이 죽을 때마다 끝까지 동행할 수 없는 아픔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는 했다. 


두 수녀도 그렇게 연약한 인간의 존재에 동정심을 가졌고, 세상의 불쌍한 이들을 돌보았으며, 평생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죽음의 시간 앞에서 불안해하는 한 인간이요, 그래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김 루시아 수녀와 손 안나 수녀는 둘 다 불면증이 깊었다. 몸이 살아서 병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었다. 새벽까지 의식은 물러가지 않았고, 그 속으로 어둠이 번져서 잠과 깸은 구분되지 않았다. [중략] 새들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헤집고 끼룩끼룩 울었다. 수녀들은 잠들지 못하고 오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음의 꼬리가 잦아들고 오리떼가 다시 잠든 후에도 수녀들은 옆 침대에 누운 사람이 잠들지 않았다는 걸 서로 알면서 뒤척거렸다.


충만한 성령과 인간으로서의 고뇌, 이것이 성직자들의 삶이 아닐까. 그 삶이 거룩한 것은 성령이 충만해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며 스스로 희생과 봉사의 길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든 몸에서 일어나 오히려 타인을 향하기에 그 삶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저만치 혼자서 핀 성직자의 삶은 우리 곁에서 먼 듯 가깝다. 손 안나 수녀가 수녀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환자를 간호하고, 혼미함 속에서 기지촌 여자들의 무덤과 수녀들의 무덤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성직자의 삶은 신성한 저곳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힘들고 지친 이곳과 뒤섞여 있다. 성령과 세상의 고통이 함께하는 삶이다.


입춘 무렵이면 수녀원 주변의 늪지에서 가창오리떼가 먼 바이칼호수로 떠난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새들, 그리고 수녀들의 안녕을 빌어 본다.


늙은 수녀들이 입춘의 양지쪽에 앉아서 돌아가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올 때의 무리와 갈 때의 무리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새들이 무리를 짓는 인연은 무엇인가. 새들도 친인척이 있고 벗이 있고 이웃이 있는지, 금년에 온 새들은 작년에 왔던 그 새들인지, 바이칼호수는 얼마나 먼지를 늙은 수녀들은 서로에게 물어보았다. 새들이 하늘에 스며서 가물거릴 때 수녀들은 희미한 새떼를 향해 성호를 그었다.

 

221016 8면문학과신앙 백그라운드(홈피용).jpg


  1. 깊은 밤을 지나

    Date2023.02.16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63 file
    Read More
  2. 시극 『순교자의 딸 유섬이』

    Date2023.01.12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57 file
    Read More
  3. 우리 곁의 하느님-권정생의 『오두막 할머니』

    Date2022.12.14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56 file
    Read More
  4. 도마야, 나는 아직 너를 도마라고 부른다-김훈의 『하얼빈』

    Date2022.11.17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54 file
    Read More
  5. 저만치 혼자서 피는 삶-김훈 『저만치 혼자서』

    Date2022.10.13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59 file
    Read More
  6. 인간의 최선, 신의 최선-이승우의 『허기와 탐식』

    Date2022.09.15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50 file
    Read More
  7.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인간의 고뇌-김동리의 『목공 요셉』

    Date2022.08.18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123 file
    Read More
  8. 뜨겁거나 혹은 따뜻한...-김원일의 "믿음의 충돌"

    Date2022.08.10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25 file
    Read More
  9. 고독한 영광-김동리의 "마리아의 회태"

    Date2022.08.10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44 file
    Read More
  10. 사랑은 공평하다-이승우 『마음의 부력』

    Date2022.08.10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40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Next
/ 5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