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파스칼 메르시어가 지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말이다. 어두운 밤을 달리는 야간열차는 우리의 인생을 축약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제자들, 일상의 삶, 평온한 나만의 시간, 안정된 주거환경, 이런 모든 것들을 버리고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나는 식빵 한 조각에 딸기잼을 발라 먹고 시골 간이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시골버스는 시간이 어정쩡해서 조금 일찍 오기도 하고 또 늦어지기도 한다고 누가 귀띔을 해준 터라 이십여 분 일찍 나가 기다렸다. 읍내까지 요금은 천 원. 이미 지난번 같이 버스를 기다렸던 노인들에게서 차비가 천 원이라는 말을 듣고 꺼내 놓았던 카드를 도로 집어넣고 지폐를 꺼냈었다. 삼십여 년간 승용차를 타고 다녀서 버스 요금을 잘 몰랐다. 버스 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버스 유리창 밖으로 먼 능선과 산맥이 언덕과 들판이 작은 숲과 계곡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볼 수 없던 풍경을 만나며 새로움과 신선함,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늘 보아오던 풍경인데도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남다른 신비와 낯섦과 미묘한 파동을 일으켰다.
래지던스 창작촌에서 읍내 성당까지는 25리 되는 거리였고 20여 분 정도 걸렸다. 낯선 성당에 발을 들인 순간 익숙한 분위기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공동 묵주기도에 이어 화답송과 성가 연습까지 전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와 분위기가 익숙해서 기시감이 들었다. 오래전 여행했던 로마와 스페인, 상해 성당에서도 우리나라 지방 소도시의 성당에서도 신비로운 감정에 취했던 일이 있었다. 어떻게 지구 반대편에서도 소도시에서도 같은 전례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그것을 통해 가톨릭의 보편적이고 일치를 이루는 미사전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마침 주임 신부님의 영명축일이라 성모회에서 준비한 점심을 공짜로 얻어먹고 수건을 선물로 받았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십분 이십 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혹시 시간을 잘못 보았나 싶어 메모해 놓은 시간표를 들여다봐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운행을 안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택시를 타야 하나. 택시비가 몇 만 원은 나올 텐데 그러며 뜨거운 유월의 햇볕 속에 서 있었다. 삼십여 분이 지나 거의 포기할 즈음 버스가 왔는데 목적지를 확인하고 올라탔다. 하루 에너지를 다 쓴 것 같았다. 열린 버스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날 때마다 힘들었던 시간이 위무되는 것 같았다. 연둣빛 반짝이는 잎사귀들, 이름 모를 꽃들,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푸른 하늘, 그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 땅을 밟고 다닐 때와 다른, 버스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먼 다른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한순간 손에서 탁 놓아버리고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으로 채운 것이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기 생이 끝까지 갈 것 같은 환상도 죽음이 늘 옆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잠언도 내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과 푸르른 산하 속에서 몽환적인 색채로 지워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