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12.21 10:04

주일학교의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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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여운숙 마리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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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는 짙어졌고, 하늘을 향한 꽃들도 잠시 안녕을 고하는 시간.


교회력도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인간은 추억을 먹고 성장하고 퇴행하고 그러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때는 뺑뺑이(은행알) 추첨을 해서 번호를 받고는 과연 어느 학교로 배정받을까 궁금함으로 기다렸던 발표. 그렇게 배정받은 북원여중. 집하고 가장 멀리 있는 곳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동안 도심을 지나면서 북적이는 시장 그리고 영화 포스터가 걸린 극장 앞을 지났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있는 진광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내리면서 우리는 곧 내릴 채비를 하였고, 반대로 비가 오는 날은 우리 학생들이 꽉 차서는 그곳 남학생들은 정차하지 않는 차를 바라보며 얼마나 야속했을지는….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여고·여상으로 나뉘어 친구들하고 멀어질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그야말로 단짝의 단짝들이 성당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들의 대모가 되고 세례를 받으니 학생 수가 2~3배로 많아지고 2학년은 간부를 맡고 주도하는 과정에 서로서로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활발했던 중고등부 주일학교 시간들. 원주 시내 연합미사를 하러 다른 성당에 가면 우리보다 큰 성당에는 기가 죽고, 체육대회를 할 때면 죽기 살기로 하였습니다.

성경경시대회를 마치고 원주가톨릭센터 앞을 지나오면서 맞았던 바람의 향기. 그때 틀렸던 문제는 지금 더욱 익히게 되는 아이러니, 가을 포도밭을 갈 때는 누군가의 자전거 뒤에 앉아서 엉덩이가 욱신거렸던 시간의 흔적. 대학생이 되어서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친구들을 보며, 어쩌면 우린 그때의 작은 활동이 밀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수줍던 모습도 겨울 성탄 전야미사를 기다리며 행했던 행사의 주춧돌이 되는 등. 주일학교에서의 일들이 작은 사회 경험이 되었습니다. 서로 협력하며 기다려 주고, 회장의 말에 따르며 함께 걷고 함께 웃었던 우리들의 발자국. 원주 단구동성당의 성모동산 앞에서 찍었던 친구와의 세례 기념사진이 불쑥 머리를 스칩니다. 그렇게 우리는 10대에서 50대 후반을 잘 견뎌온 것 같습니다. 그중에 한 친구는 하느님을 만나러 갔고, 어떤 친구는 사제가 되고, 잠시 성당을 떠나기도 하고, 또 늦된 신앙생활이 더욱 빛을 보는 친구들.

 
거제도라는 생소한 곳으로 취직을 위해 와서는 여태껏 머문 것 또한 하느님의 품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1999년 첫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이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 복음에 따라 신부님께서 학생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들어 봤던 친구! 손들어 보세요.” 나는 뒤쪽에서 학생들을 살피다 깜짝 놀랐습니다. 맨 앞에 앉았던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아이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하면서도 기특했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준 내 아이, 과연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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