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12.26 12:00

아련한 추억어린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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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광지 가타리나 수필가

복잡한 심경으로 성전에 앉았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이라 찬찬히 구석구석 부분부분 살폈다. 마음에 저장해야 했다. 제대 왼편 벽에는 ‘그리스도왕 대축일’ 글자 아래 ‘현 성전과 송별미사’라고 게시되어 있었다. 소식을 들어 알고 왔지만, 붙어 있는 글자들을 보니 또 아린 가슴이 나댔다. 이 미사를 끝으로 성전은 헐리게 된다는 것이니.


나는 1979년 봄에 창원으로 와서 용지공소 건물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로 가음동성당을 건축하여 1982년 봉헌식을 치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겪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아들 다미아노와 함께 신앙의 추억을 진하게 쌓았다. 이 성전 안에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하게 모여 여름신앙학교를 치르던 때가 있었다. 교사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 시간들이 있었다. 큰길 건너 아파트에서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성당에 이르는 시간들 속에서 아이는 뼈가 굵어 갔다. 우리 가족은 다미아노가 고교시절에 마산으로 이사했다. 


마지막 미사가 시작되었다. 사제는 ‘마지막’이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설렘’을 안겼다.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서 희망이 된다며 신자들을 바라보았다. 자꾸 아리던 내 가슴에 설핏 빛이 들었다. 41년간 이 성전에서 복음이 퍼져나갔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재개발이 필요했다. 이해타산들이 작용하여 순탄치 못한 진행과정을 겪으며 노심초사한 시간이 길어지기도 했지만 이제 희망의 시간이 왔다. 


사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치기를 바라며, 강론 시간 영상으로 소상하게 새 건축을 설명했다. 온갖 포인트를 달리하여 희망의 성전을 전달했다. 이 미사 이후 임시성전으로 옮겨 2년이 지나, 새 성전으로 드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추억을 길러 올리느라고 아렸던 가슴을 내려놓았다. 내 생의 열정을 태웠던 이 성전의 기억들은 마음속에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영성체가 끝나자 사제는 제병을 남기지 않고, 감실문도 잠그지 않았으며, 이제 여기는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선언했다. 내 가슴에 남겼듯이, 사목위원들은 철거될 성당의 면모를 세세히 빠짐없이 영상으로 담아 보여주었다. 40여 년 전, 이 성당을 짓도록 부지를 기부한 부부가 참석하여, 기적 같은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감동의 박수가 쏟아졌다. 마침내 송별미사는 다름 아닌 감동이 되었다. 옆 사람과 손을 잡고 석별의 정 노래를 부르며 비록 눈가에 물기는 맺혔지만, 감동이 서운함을 누르고 희망을 향하게 했다.


이 본당에서 여전히 뿌리를 박고 있는 지인들이 더러 있었다. 청춘일 때 만난 그들이 창원지역에 한 본당 한 본당 세워질 때마다 진을 빼내며 노년에 이르렀다. 또 새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그들에게 특별히 은총이 내려지길 기도했다. 내가 망설임을 접고 마지막 미사에 참석하길 잘했다. 이 성전을 그냥 보냈으면 어쩔 뻔했을까. 나는 멀리 있는 다미아노에게, 그때 그 시절 함께했던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가음동성당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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