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4.01.11 11:46

섬과 사막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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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희선 가타리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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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나와 사막으로 달리고 있다. 이십팔 년을 살았던 곳이 섬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이 그렇고, 십일 년의 이국 삶이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정착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은퇴가 다가올수록 다시 떠나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이방인이 되지 않으려 애썼던 창원살이, 붙박여 살 수 있었던 그 시작과 중심은 언제나 성당이었다.

 
외국에서도 성당은 그런 곳이었다. 뿌리가 깊지 못한 초보 영세자였던 내게 신앙은 ‘질문투성이’였지만, 성당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기에 다듬어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 나는 한 나라임에도 문화가 극명하게 다른 북부 미네소타와 남부 댈러스의 한인교회를 경험했다. 이민자 수와 직업군이 달랐던 두 지역의 교회는 규모 면에서나 신자들의 입김, 그리고 오시는 신부님의 성향까지 달랐던 것 같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어서 많은 것이 변했겠지만, 이민자들이나 곁들여 지내던 그곳 유학생과 가족들에게 교회는 상상보다 더 큰 의미였다. 많은 가족과 끈끈하게 지냈지만, 창원에서 살면서 그 관계는 아득해졌다.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그때의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작은 섬처럼 동떨어져 있었다. 그 느낌은 결혼 전의 삶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 빈번했던 서울 나들이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전시 하나를 보기 위해서 기차를 예매하고 그곳 공기를 쐬고 와야만 했었지만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나를 형성했던 고향의 모든 것과 예술 문화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라졌다. 그렇게 이미 두 개의 섬이 생기고 난 뒤, 언젠가 이곳도 또 하나의 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지난 8월 말로 은퇴했다. 은퇴라는 큰 산을 넘기도 전에, 일말의 상념에 빠져들 새도 없이 재취업한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예측 속의 후보지가 아니었던 강원도 평창으로 사무실과 실험실 짐을 서둘러 챙겨 일차적인 이사를 했다. 그날 밤 단지 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나는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디든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강원도라는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흥분과 낭만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곳 특성상 도시는커녕 마을 생활권과도 완벽히 격리된 곳이었다. 느닷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유리창 밖 적막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두려움 자체였다. 성급한 결정이었을까? 남편은 두세 차례 방문했었던 터라 나와는 다르게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 걷잡을 수 없던 찰나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핸드폰으로 성당을 찾아보고, 그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자동차로 20분 거리쯤 되어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도 있었다. 그때의 안도감이란……. 믿을 수 없는 평화가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다. 


익숙하고 편안했던 곳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되었던 떠나는 일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젊은 날 궁금했던 상상 속의 그 미래가 어떻게 요약되어 가는지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몇 년 후에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도 기정사실이다. 이쯤 되면 나의 운명과 하느님의 섭리도 조금은 눈치챌 수 있다. 사막은 언제나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었으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실현되는 것임을 알게 하신다. 낮은 자세로 다가가야 곁을 주며,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그들의 따뜻한 인정을 온몸으로 누렸다. 얕은 눈물로 대신할 수 없는 감사와 깊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한군데 머물면서 배우는 지혜를 누군가는 끊임없이 떠돌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저울의 추처럼 평화가 공존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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