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4.02.15 10:46

아내를 황제처럼 섬기던 어떤 젊은 노예

조회 수 51
Extra Form
저자 윤혁재 레오 시인

240218-영혼의뜨락-백그라운드(홈피용).jpg

 

가난하거나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함이다.”라는 신앙의 본질을 배우려, 소신학교 대신학교 군대 삼 년을 마칠 때까지 나를 데리고 다니다, 운이 안 좋아 학교로부터 쫓겨난 내 열등의 시간 동안 부천 뒷골목 가난한 동네를 헤맬 때, 배웠던 것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어릴 적 읍내 살던 아픈 장애 처녀 마리아를 따뜻하게 맞이해 살아보라는 내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날로부터 마리아와 함께 병원 문턱을 한 삼십 년 넘게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턱하니 기다리고 서 있던 그 두려운 죽음의 골짝을, 당신이 기적처럼 우리에게 보내주신 귀한 딸 아름이와 함께 제 어미 손 꼭 잡고 감사한 맘으로 기어오르다, “이젠 이십일 세기의 의술보다 최고의 치료는 맑은 공기다.”라는 주치의 진단을 보듬고, 954호 중환자실을 탈출하여 고향 산천 내렸더니, 여직 까맣게 귀 막혔던 놀라운 사실 하나에 또 바수어진 내 맘 싸매지도 못한 채, 나는 이 소문의 진원지를 여기저기 헤적여보았다. “약한 이웃을 도와주는 게 나를 위한 것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세뇌시킨 당신을 흉내 내다 ‘반푼이’가 되다 못해, 이젠 위선자라며 ‘새꼬롬한’ 눈총을 쏘아대는 이놈의 고향을 고마 콱, 하느님요! 우째삐리까요? 


당신이 더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태생으로, 가는 팔 다리로 새파란 숨을 내쉬다 자주 엎어지는 장애가 일어나는데요. 그때마다 장모님은 “찬찬히 두 손 잡아 일으켜, 괴로워하더라도 잘 달래어, 그 고된 ‘석션’을 기도로써 서로 참아내며 살아 주길 바라네.” 하시던 그 간절한 바람보다, 당신이 부탁한 이 길을 세상 그 뭣보다 두 귀 쫑긋 세워 보살피라 하셨기에, 어린 딸 아름이와 함께 그 너른 눈물강을 애 터지게 저어 오다 육십이 다 된 저물녘에, 어찌 오늘은 이 노예의 팔도, 귀한 딸의 고운 손도 빌리지 않고, 하느님 손만 꽉 잡고 저 너머 길을 혼자 갈 줄 아셨는교, 저 공중의 빛나는 수많은 별들은 저마다의 신뢰의 희망이지만, 그대가 철석같이 의지하던 이 노예의 별은 잠시 동안 반짝이다만 별똥별이었네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한 번 그대를 위한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으오, 지난날의 내 결연한 의지가 나약한 환상에 머무른 게 너무 죄스럽소, 마리아요, 우리가 즐겨 듣던 ‘레너드 코헨의 푸른 레인코트’ 위로 올해도 어스름히 내려앉는 성탄이, 는개처럼 내 맘의 강을 사알살 흘러 다니네요, 참 기쁜 소식 하나요, 귀한 딸 아름이가 어릴 적 당신의 병약한 죽음의 트라우마에 한동안 헤어나지 못하다 요샌 주일미사도 보며 그냥저냥 지내 주니 참말로 고마울 뿐이지요. 


“이웃을 내 식구처럼 어루만져 주라.” 하신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던 ‘반푼이’ 같은 신앙의 삶과, 먼눈으로 빈정대며 바라보는 세상의 삶과의 괴리에 절망한 지금을, 또 불러내시어, 이 열등의 나이에도 시詩를 한번 써보라 꼬드기십니까. 내 컴컴한 헛간의 가슴 밭에 오래 처박혔던 검푸른 시간들이, 저 하얀 하늘 밭에 쏘옥 잡혀 나와, 시퍼렇게 잡아 삼킬 바다처럼, 내 바닥 모를 바알간 눈물이 겁 모르고 대들다, 전신줄에 목을 매는 바람의 시간에 그만 폭삭 절여져, 잘 썩은 거름인 양 소쿠리에 퍼 담아, 한겨울 보리밭에서 더는 하얗게 움츠려들지 않으려, 샛노란 몸 빠끔히 내미는 저 이파리들을 위해 흩뿌리라 하시는교. 시인이 밤새도록 어루만져 토해 내는 시처럼 참 기도인 양, 두 손 모으겠습니다.


✽석션suction: 폐 속에 찬 가래와 침을 빼 내기 위해 호스를 폐 속까지 넣어 빨아내는 의료 행위

 


  1. 십사일 다시마

    Date2024.03.22 Views50 file
    Read More
  2. 귀하지 않은 목숨은 없다

    Date2024.03.22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41 file
    Read More
  3.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서(2) 성지 순례: 그리스 편

    Date2024.03.22 Views19 file
    Read More
  4. 감사편지

    Date2024.03.14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9 file
    Read More
  5. 십자가 아래서

    Date2024.03.07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9 file
    Read More
  6.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니다

    Date2024.02.29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7 file
    Read More
  7. 오륜대 순교자 성지

    Date2024.02.29 Category시와 함께 떠나는 성지순례 Views23 file
    Read More
  8. 꼬끼오오~~ 새벽 일꾼들

    Date2024.02.22 Views46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8 Next
/ 38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