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4.02.22 11:41

준비되지 않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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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손신기 안드레아 수필가

국화축제가 열리는 늦가을이다. 대로변의 은행나무 잎들은 이미 노랗게 물들고 바싹 말라서 온기마저 완전히 빼앗긴 채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한 잎 두 잎 지나간 아쉬움을 뭉쳐 쌓아올려 인도 곳곳에 작은 섬들을 만든다. 이렇듯 가을은 바짝 쫓아오는 겨울 북풍의 조급함에 밀려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어 빨라지는 계절의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국화꽃의 비닐하우스 온실 재배는 1961년 마산 회원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성공하였다. 추운 겨울에 온실 재배가 성공하여 국화꽃이 처음 열리는 날, 최초의 생명이 하느님의 따뜻한 입김에서 태어난 때처럼 엄청난 놀라움과 기쁨으로 환호했을 것이다. 이어 상업재배와 일본수출까지 이루니 마산은 국내 화훼산업의 메카로 떠올랐고 이를 기려 매년 원조 국화축제가 마산에서 개최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추억의 나이테를 세다 보니 발걸음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빨라진다.


폐막 며칠 전 아름다운 국화꽃 향기와 인파로 넘치는 국화축제장을 서둘러 찾았다. 갖가지 형상과 의미가 꽃으로 피어난 국화작품은 예년과 비슷한 콘셉트이지만 여전히 수더분하여 오히려 정겨움을 더한다. “당신이 참 좋다”라는 가랜드가 걸려있는 국화 터널을 통과하니 마음이 절로 따뜻해진다. 이 따스함이 스러지기 전에 이를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같이 찍고 싶어 항상 밝은 미소의 그녀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아쉽게도 아예 병실을 벗어날 수조차 없단다. 그러면 진노랑 국화꽃 향기를 병실의 그녀에게 어떻게 전송할지가 고민이다. 


얼마 전만 해도 그들 부부와 우리 부부가 이곳에서 함께 산책을 하곤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치료를 할수록 병이 나아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악화되는 것 같아 바로 그녀를 위한 구일기도를 시작하였다. 위급할 때면 무조건 간절한 탄원으로 소리쳐 매달리는 묵주기도. 항암치료를 잘 마치도록 도와달라는 지향으로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쳤는데 청원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우리의 마음은 극심한 충격으로 인하여 준비되지 않은 슬픔 속으로 깊숙이 빠졌으며 연민과 아쉬움과 눈물로 가득 차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성모님은 구일기도를 듣기는 하시나?’ ‘여기서 기도를 종료해야 하나?’ 생각할수록 모든 비난과 원망은 성모님에게 쏟아졌고 그날 밤은 온통 비탄과 절망만이 가득하였다. 다음날 아침 구일기도에 대하여 차분히 성찰하니 그녀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보살핌을 받아 지상에서의 고통, 근심 모두 떨치고 지상에서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영원한 안식. 영원한 구원은 하느님의 예정대로 이미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제야 진정한 감사기도를 바칠 수 있었다.


내년 국화축제 때에는 생전에 함께 걸어갔던 해양공원 보도교에 올라가서 금년 축제 때 전하지 못한 진노랑 국화꽃 향기와 보고 싶은 내 마음을 국화꽃 묶음에 실어 은하수를 건너가는 합포만의 잔잔한 물결에 띄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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