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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 2학년이던 해 늦은 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교회엘 나갔다. 그때 강단 위에 선 목사님이 십자가에 달인 예수와 그 좌우의 강도 이야기를 했다. 임종에 이르러 회개한 대가로 <낙원>을 약속받는 우도右盜의 복을 선망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와 반면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예수에게 빈정거린 좌도左盜의 완맹한 저항은 저주받은 어리석음이라고 비난했다. 이때 나는 우도보다 좌도 쪽에 마음이 쏠렸다. 실국의 한이 얼마나 뼈저리게 원통하고 사무치면 죽음을 겪는 고통 속에서도 위로받기를 단념했을까 싶었다. 로마 총독 치하의 당시 유대 사람들도 일제 총독 치하의 우리와 같이 그렇게 암담한 절망 속에 신음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그 좌도는 나의 가슴속에 새겨진 채 사라지지 않았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는 이렇게 작가의 어릴 적 강렬한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된 작품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예수의 왼쪽에 있었던 죄수의 이름이 바로 ‘사반’이다. 「사반의 십자가」는 이 도둑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물론 소설은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작가가 상상으로 그려낸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사반은 2천 년 전 로마 식민지였던 유대의 독립운동가이며 혈맹단 단장이다. 그는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다린다. 이때 예수가 나타나고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라고 생각한다. 사반도 예수를 만나보지만 예수가 자신이 추구했던 지상의 행복과 해방이 아닌 내세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만다.

 

실망은 하였지만 사반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만은 믿는다. 그러한 믿음을 기반으로 그는 메시아를 만나면 혁명에 성공한다는 예언에 따라 로마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외부 세력과의 연대 문제가 얽히면서 사반은 결국 배신당해 로마군에 체포되고 만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 역시 이 소설에서 사반 휘하의 혈맹 단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가 예수를 로마군에 넘긴 이유는 예수가 체포되면 마침내 기적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무찌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받아들이며 순순히 목숨을 내놓는 행보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 해방의 정신적 지주였던 두 사람은 결국 같은 날 같은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작가는 사반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가 드라마틱한 이유는 성경에서 부수적인 인물에 불과한 사반이 예수와 대립되는 사상가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핍박받는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같은 과제를 두고 무장투쟁을 외친 사반과 만인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현실 너머의 낙원을 설파한 예수. 작가의 시선도 독자의 공감도 이 작품에서 현실적인 입장의 사반 쪽에 더 가깝게 가 있다.

 

어쩌면 한낱 잡범에 지나지 않을 사반을 김동리 작가는 왜 이렇게 주목했을까.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던 50년대는 6·25 사변을 겪은 우리 민족의 고난이 극심하던 시기이다. 그 현실을 목격한 작가가 현실적인 구원 쪽에 더 기울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허용된다면 본질적으로 작가는 또 다른 예수를 그려낸 것이 아닐까. 

 

예수는 그 앞에 놓여진 현실 앞에서 깊은 고뇌를 하였으리라. 로마로부터 핍박받는 비참한 상황에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혁명가의 피가 끓어오르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동리가 주목하는 사반은 그 고뇌하는 ‘인간’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구원은 결국 현실적인 한계를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결국은 인간으로서 고뇌를 넘어, 우리는 끝끝내 초월적인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사반의 십자가가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보다 우리 가슴에 더 오래 남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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